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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2.01 13:10 수정 : 2005.02.01 13:10

‘배꼽수술’ 등 여성의 몸에만 책임을 지운 가족계획

도회적으로 차려입은 엄마·아빠가 딸·아들 손을 잡고 자랑찬 표정으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의 미래는 화창할 것 같다. 이게 다 애를 둘만 낳은 덕분이다. 대한가족계획협회가 1970년대 내내 뿌린 포스터이다. 포스터와 뗄 수 없는 게 표어다. 1966년부터 대대적으로 벌어진 3·3·35 운동은 “세살 터울 셋만 낳고 35세 단산하자”는 것이었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많이 낳아 고생 말고 적게 낳아 잘 키우자”던 기존 표어와 달리 낳을 애들 수도 딱 정해주던 구체적인 것이었다. 1970년대로 넘어가서는 “딸·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내 힘으로 피임하여 자랑스런 부모 되자”는 표어로 발전했다.

실적 채우기에 급급

일제는 병력 확보 차원에서 “낳아라! 불려라! 길러라!”라는 구호로 다산을 독려했고, 이승만 정권 역시 안보 기반 확충을 위해 다산정책을 유지했으나, 박정희는 단칼에 이를 뒤집었다. 애를 주렁주렁 낳는 게 조국 근대화의 걸림돌이라고 여겼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나란히 시작된 가족계획 사업은 대대적인 애낳기 단속이었다. 계몽 방식은 다양했다. 모든 방송 드라마에 등장하는 부부는 무조건 아이 둘 이하를 둬야 했고, 우표·담뱃값·극장표·통장·주택복권에는 “내일이면 늦으리! 막아보자 인구폭발”이라는 구호가 도배됐다(<20세기 여성사건사> 여성신문사 펴냄). 마을마다 ‘5호 담당제’에 버금가는 감시도 벌어졌다.

피임 지식 전달과 보급을 위해 리·동별로 배치된 가족계획 지도원들은 “밤에는 좌담회, 낮에는 가정방문”으로 온 동네 남녀의 ‘밤생활’을 간섭했다. 시·군 보건소별로 목표량도 정해져 있었다. 실적 채우기에 급했던 지도원들이 권장한 것은 피임보다는 불임이었다. 남자들이 정관수술을 ‘거세수술’이라며 꺼린 통에 여자들이 주로 ‘배꼽수술’로 불리던 난관수술을 받았다. 피임 방법도 간편한 콘돔 사용에 앞서 자궁 내 부착용 루프 사용을 권장했다. 가족계획의 책임을 전적으로 여성에게 지웠던 셈이다. 지도원들도 대부분 ‘아무개 여사’로 불리던 여성들이었다.


정신이 서면 부작용 줄어든다?

성과는 놀라웠다. 1960년대 5명 안팎이던 자녀 수는 70년대 중·후반 2∼3명으로 확 줄었다. 가난한 집 엄마들이 가장 큰 수혜자였으나 동시에 피해자였다. 이들의 몸은 질 낮은 불임수술과 선진국에서 검증되지 않은 피임약제의 ‘실험장’이 돼야 했다. 허리 통증과 하혈, 구토와 어지럼증이 속출했지만, 당국은 출산 억제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여성들의 안전은 깊이 살피지 않았다. 대신 부작용을 호소하는 여성들에게 ‘마음의 자세’를 거듭 강조했다. “…가족을 조절하기 위해 (약을) 먹어야 되겠다는 정신이 선 다음에 복용한다면 이런 현상(부작용)이 훨씬 적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가정의 벗> 1970년 8월). 1968년에는 마을별로 ‘계몽된 어머니들’ 중심의 가족계획어머니회가 조직됐다. 이들은 피임과 불임의 전도사로 활동하며 ‘자발적 호응’을 유도했다. 실적에 따라 지원 규모를 달리한 결과, 마을마다 경쟁적으로 세를 불려 회원 수는 1970년대 말 75만여명으로 불어났다. 국가 주도의 가족계획으로 여성의 몸에 대한 이해와 권리 개념은 싹부터 잘렸던 셈이다.

1980년대로 넘어가면서 출산억제는 브레이크 없이 질주한다. 구호도 “둘도 많다”로 바뀌었다. 전국 주요 도시에 인구 시계탑을 세워 한반도가 곧 폭발할 것 같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불과 십수년 만에 출산율 저하에 따른 대책 마련에 이제 정부는 물론 온 사회가 분주하다. 계획 없는 가족계획의 후유증이다. <한겨레21>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 [표지이야기]박정희 X-파일 14면
    <한겨레21>은 장장 60쪽에 이르는 ‘박정희 표지특집’을 선보인다. 그는 아직 죽지 않았다. 26년이 흘렀지만 그는 지금도 살아 한국 사회에서 활개친다. 한-일 협정 문서 등 ‘박정희 시대’의 비밀도 하나둘 밝혀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밝혀질 예정이다. 1979년 10월26일을 다룬 영화 <그때 그사람들>도 개봉된다. 2005년, 우리는 왜 박정희인가. <한겨레21> 기자들이 총동원되어 ‘박정희 시대’와 그가 남긴 유산을 취재했다. 22면 우리가 몰랐던 ‘인간 박정희’
    여자 문제에서 기자에게 박치기를 했던 에피소드까지. 한때 막걸리를 즐겨 마시며 서민의 표상이 됐던 그가 시바스리갈을 마시며 망가지기까지. 당시 김재규쪽 변호사와 청와대 출입기자의 증언을 토대로 ‘우리가 몰랐던 박정희’를 재구성해본다. 32면 대통령이 남긴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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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의 유산을 계승할 것인가, 아니면 그와 절연할 것인가. 박정희와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가는 한나라당 내 대권게임의 전초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유산은 2007년 대선의 최대 쟁점이 될 수도 있다. 박근혜에겐 과연 유리한 것인가. 66면 설날 퀴즈큰잔치
    내가 쏘면 퀴즈 개시야, 땅!
    박정희 특집호의 하프타임에 찾아온 2004 설 퀴즈큰잔치. 자동차, 노트북, 대형TV…. 그 시절 각하의 하사품같이 푸짐한 퀴즈 경품이 쏟아진다. 너무 어려운 문제도 없다. 그때 그 시절의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세 가지 퀴즈, ‘하면 된다’ 정신으로 잘 풀어보세~. ▶[한겨레21]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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