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피해생존자 말하기 대회 행사장에 모인 140여명의 사람들은 피해사실을 털어놓는 참가자들의 모습을 보고 "당신은 아무 잘못이 없어요!"라고 외치기도 하고 공감해 함께 울기도 했다. 5시간에 걸친 대회가 끝난 뒤 탈진해 누워있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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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성폭력피해생존자 ‘경험담’ 발표…통곡의 눈물바다 “지난 25년 동안 나는 부끄러운 존재, 더러운 존재, 가치없는 존재로 살면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가해자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눈물과 통곡의 바다였다. 침묵 사이로 간간이 흐느낌과 탄성이 쏟아졌다.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이 함께 바닥에 앉아 자신의 피해경험을 차례차례 말해나갈 때 청중은 들썩였다. 피해생존자들이 웃음을 보일 때는 같이 웃었고, 박수를 쳤고, 그들에게 소리치고 싶다고 할 때 같이 “가해자, 너에게 모든 책임이 있어!”라고 꾸짖었다. 지난 26일 서울 대학로 쇳대박물관에서는 성폭력피해자들이 직접 등장해 자신의 피해경험담을 말하는 행사가 열렸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그녀들의 소란, 공감의 세상을 열다’라는 제목으로 연 행사다. 상담소가 지난 2003년부터 매년 열어온 ‘성폭력 피해생존자 말하기 대회’는 사건이 발생한 뒤 피해자들이 입은 유·무형의 모든 상처를 함께 치유하고 공감하면서 피해자에게 편견을 덧씌우는 성폭력의 본질을 알리는 데 목적이 있다. 이날 관객은 총 140여명. 6명의 남성도 포함돼 있었다. 언론에 이를 공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상담소쪽은 ‘성폭력 피해 생존자’라는 말을 쓴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이들을 ‘피해자’로만 머물게 하지 않고 적극적인 존재로 거듭나게 하려는 이유에서다. 말하기 행사의 사례자로 나선 생존자 여성들은 20대부터 30대까지 모두 5명으로 아동 성추행부터 데이트 강간, 강간 치상까지 유형도 다양했다. 첫 참가자로 등장한 이아무개씨(22)는 18살 때 군인에게 성폭력 피해를 겪은 경험을 털어놓으며 5년여에 걸친 법정 투쟁 과정을 말했다. 그의 사건은 검찰에서 무혐의처리되었지만, 발생 5년 만인 지난 1월 민사재판에서 ‘성적자기결정권 침해’로 인정받아 3000만원의 손해배상 승소 판결을 거뒀다.
‘성폭력 피해생존자 말하기 대회’ 140명 관객…첫 언론공개 이씨는 특히 수사과정에서 벌어진 2차 성폭력 피해경험을 소상히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그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입원했을 때 군헌병대 수사관들이 찾아와 처녀인지를 묻고, 좋았어? 라고 물었다”며 “분노가 일었지만 조사를 엉망으로 만들까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고 초동수사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씨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헌법의 이념과 달리 현실 수사과정에서 성폭력 피해 여성은 ‘수치스런 여자’라는 편견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이씨는 사건 뒤 법대에 진학해 법학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법정 투쟁을 거치며 도움을 받았던 성폭력상담소와 무료로 변론해주고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강지원 변호사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씨는 “내가 받은 도움을 사회에 돌려주는 의미로 성폭력 피해자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또 다른 피해 생존자로 나선 김아무개씨(35)는 10살 때 집안이 어려워 맡겨진 이모집에서 이종사촌 오빠에게 입은 친족 성폭력을 고발했다. 그는 “성폭행 뒤 집에서 내쫓길까봐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장독대에 붙어 오랫동안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더러운 존재가 아니라 치유받아야 할 대상이고 가해자가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걸 최근에야 비로소 알았다”고 말했다. 아이처럼 한참을 목놓아 통곡하던 그는 함께 눈물 흘리던 사람들이 “당신 잘못이 아니예요!”라며 소리치자 한참 만에 고개를 들면서 “(내 잘못이 아님을) 이제 알았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부끄러워 해야 할 건 내가 아닌 가해자라는 것 비로소 알아” 박아무개씨(34)는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읽었다. 유아 시절 노인과 10대 청소년에게 입은 성추행을 말하며 그는 “엄마에게 위로와 이해를 바랐는데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해서 마음이 아팠다. 투병중인 엄마 역시 여자로서 숨겨야 했던 시간들이 많다는 걸 알고 후회했다”고 말했다. 그는 “엄마의 말과 달리 나는 많은 이들에게 내 상처를 말했고, 많은 지지와 공감을 얻었다”며 “엄마가 어디서든 웃음을 잃지 말길 바란다”고 했다. 김아무개씨(25)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겪은 10여차례의 성폭력 피해를 털어놨다. 김씨는 담임교사, 친오빠의 성추행을 거쳐 남자 친구, 강도 등 수차례의 성폭행 사건을 털어놓았다. 그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지금까지 수차례의 자해와 자살 기도를 반복했다고 증언했다. “수사관들은 가해자와 예전에도 관계를 가졌냐고 물었고, 변호사는 행동을 조심하라고 말했고, 의사는 옷을 벗어보라며 반항의 흔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내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내가 혹시 정말 이상한 아이가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재발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그는 최근까지 안정을 찾지 못했다며 “성폭력 피해 여성에 대한 편견을 이제는 제발 거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호주, 미국에서는 수천명 청중대상으로 ‘피해경험담’” 눈물을 닦아내느라 행사 참여자들 사이에서는 휴지통이 쉴새없이 손에서 손으로 건네졌다. 5시간에 걸친 행사가 끝나자 몇몇 참석자들은 듣는 일만으로도 버거운지 자리에 드러누웠다.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몇몇 청중은 자신의 피해담을 즉석에서 털어놓기도 했다. 특히 ‘신부에 의한 성폭력 사건’을 사회에 알린 한 성폭력 피해 아동 어머니는 “아이가 감기로 아파도 힘이 세져야 한다며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한 참석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받아들고 자신의 유사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게 된다면 견딜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며 “말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제도적으로 피해가 반복되지 않고 피해자들이 더 이상 나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남성 참여자들의 지지도 이어졌다.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남성 참가자 이경환(28)씨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울었다”며 “법조인들도 피해자들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적극 공감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호주, 미국 등에서는 10년 전부터 이런 행사가 수천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앞으로도 이런 집단적 치유의 장이 많이 형성되기를 바라며 생존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공감과 생각의 기회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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