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2.02 17:05 수정 : 2005.02.02 17:05

미국 캘리포니아 헤드워터숲을 지키기 위해서 783일 동안 투쟁했던 여성이 있었다. 줄리아 힐이라는 25살의 이 여성은 2000년 묵은 삼나무 ‘루나’를 베지 못하게 하기 위해 55미터의 나무 위로 올라갔고 2년 넘게 지상에 발을 디디지 않았다. 식사와 옷은 친구들이 날라줬고, 작은 양동이가 화장실을 대신했으며, 목욕도 나무 위에서 해결했다고 당시 뉴스들이 전했다. 지난 2000년, 드디어 이 여성은 벌목을 시도했던 목재회사 ‘퍼시픽 럼버’로부터 나무를 베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지독한 투쟁이었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에 줄리아 힐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경부고속철도 천성산 터널공사의 일방적인 진행을 반대하는 지율스님이 있다. 오늘은 그가 곡기를 끊은 지 100일째 되는 날이다. 이 글이 신문지상에 실렸을 때는 이미 그에게 바치는 추도의 글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속이 탈 정도이니, 이번 싸움이 ‘목숨을 건’ 투쟁인 것만은 한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다. 처절하고도 끔찍하다.

스님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정치인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 동안 스님의 단식투쟁을 두고 원망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정부와 지율스님, 둘 중에 누가 더 고집불통인가? 자연을 살리자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거는 것은 이율배반이 아닌가? 이미 공사는 너무 많이 진척돼 있고, 만약 되돌리게 된다면 경제적 손실이 너무 커지는 것 아닌가? 목숨을 담보로 국가적 사업을 협박하고 있다,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등등.

삼나무를 지켜냈던 줄리아 힐이라면 지율스님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당신의 목숨만은 지키라’고 충고했을까? 모르겠다. 나는 지율스님의 단식투쟁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자 문득 스님을 통해 천성산의, 아니 자연의 소리없는 비명이 들렸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지금, 스님의 말라가는 육신을 통해서, 지금껏 외면해왔던 자연의 죽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깊은 산속에서, 저 아래 땅속에서, 하천과 바다에서, 우리 발밑의 하수구에서 매일매일 되풀이되고 있는 절망적인 자연의 죽음을 말이다. 죽어가는 자연에게,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 말고 대충, 평화롭게 살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제 환경문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돌이키기 위해선 여러 가지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자연을 살리는 일이란 원래 너무 많이 진척된 일을 거두어들이고, 돌이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5년 전 줄리아 힐의, 어찌 보면 기이하고도 재미있는 투쟁은 지율스님에게로 와서 그야말로 ‘사투’가 되었다. 그만큼 자연은 빠른 속도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박미라/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위원 gamoo21@hanmail.net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