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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06 20:27 수정 : 2005.12.07 14:03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으나, 유명한 모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면 하이디 소녀 복장을 한 여자 직원들이 옆에 바짝 쪼그리고 앉아 주문하는 내 입만 쳐다보고 있었더랬다. 고객의 눈눞이를 맞춘다는 그 처사는 대접받는다는 느낌보다 심히 불편한 마음만 불러일으켰고, 고객의 미세한 취향까지 고려한다는 하이디 소녀들의 끊임없는 질문들은 발랄하다 못해 어수선하기까지 했다. 같이 식사하는 동료들은 무릎 끓고 시중 드는 여자 직원들에 그새 익숙해졌는지 왜 여자들에게만 저런 걸 시키는 거냐고 투덜대는 나에게 “좀 친절해라”고 한마디씩 꽂았다. 졸지에 불친절한 사람이 돼버린 나는 과잉친절의 불편함에 더해 밥맛까지 떨어져 그 좋아하는 스테이크도 다 해치우지 못했다.

내가 어떤 종류의 ‘친절함’ 혹은 ‘친절한 척 함’에 유독 민감한 것은 친절한 사람임을 포기하게 된 나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 나라고 친절해서 남들에게 사랑받고 싶고 화기애해한 분위기에서 대화란 걸 나누고픈 욕망이 어찌 없었겠는가. 그런데 어느 순간에 뱉은 나의 이야기는 의도와는 상관없이 늘 “강한 주장”이 되어 있었다. 그 자리가 끝나면 나에게 비판받았다는 느낌으로 불편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처음에는 나의 걸걸한 목소리와 사투리 억양 때문이려니 생각해 그 익숙한 사투리도 덜 쓰고 되도록이면 자근자근한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 노력도 했다. 별 효과가 없었다. 내가 생각 없이 하는 말들이 강한 주장으로 들리는 이유는 바로 얌전하지 못한 외모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소위 여자답지 않은 얼굴과 외모가 갖는 의미가 나의 말 이전에 작동하면서 그 내용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얌전한 말투와 방긋거리는 얼굴을 갖추지 못하면 친절한 사람이 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친절함’을 포기했다.

그러고 나니 신기하게도 내게서 ‘다른 종류의 친절함’을 발견하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뚝뚝한 말투를 사랑해주고 사투리를 따라 하고, 심지어 비분강개하느라 흘린 침까지 닦아주면서 귀여워해주는 그들에게 난 더없이 친절한 여자다. 그러면서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내가 과대포장된 과격함으로 고민했던 것처럼 과소포장된 ‘화냄’에 대해 고민하는 여자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나이를 어디로 먹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얼굴에 땅달막한 체격을 갖고 있는 한 후배는 자기가 아무리 화를 내도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책상 위에 있는 모든 물건을 집어던지는 난리를 친 후에야 화났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긴 하겠다. 그 후배더러 친절함을 포기한 나의 경험을 들려주면서 “일단 화낼 수 있는 인간임을 포기하면 어떨까” 한마디 해주었다. 그 후배 화내더라.

정박미경/ 자유기고가 chaos400@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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