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28 14:44
수정 : 2019.08.28 14:57
[한겨레21] 당사자 ‘푸른나비’가 올린 국민청원 “4512명만 동의했지만 난생처음 행복”
4512명.
아버지로부터 10년 동안 성폭력을 당한 딸이 석 달간 생계를 작파하고 매달렸던 ‘친족 성범죄 공소시효 폐지를 청원합니다!’ 국민청원에 동의한 사람의 수다(사진). ‘이천 강아지 성폭행 사건’ 국민청원이 20만 명을 돌파한 것을 고려하면, “우리는 동물보다도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친족 성폭력 생존자들의 절규가 억지로만 들리지 않는다.
4월 말 일어난 15살 딸 살해사건 뒤
청원자는 친족 성폭력 생존자 자조모임에서 ‘푸른나비’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50대 초반 여성이다. 푸른나비는 8월6일 <한겨레21> 인터뷰에서 국민청원을 결심한 직접적 계기로 4월에 일어난 “15살 소녀의 죽음”을 언급했다. 30대 의붓아버지가 자신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딸을 살해했고, 친어머니가 그 과정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푸른나비에게 소녀의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푸른나비의 어머니도 가부장제의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에게 협력한 가해자였다. 푸른나비가 오랜 세월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할 때 방관했고, 딸을 연적으로 여겨 딸이 죽기를 바랐다고 했다. 푸른나비는 슬프고 짧은 생을 마감한 15살 소녀를 떠올리며 1심 재판이 열리는 광주까지 울면서 쫓아 내려가기도 했다. 그 소녀처럼 가족에게서 성적으로 학대받고 죽어가는 아이와 여성이 비일비재한데, 아이의 죽음은 전남편을 살해한 ‘고유정 사건’에 완전히 덮였다. ‘이건 사회의 문제고 언론의 문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뭐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푸른나비는 말했다. “한 생명이 죽었고, 친족 성폭력 생존자들이 이렇게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았는데도 세상이 안 변했다. 내 딸아이 세대만큼은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생존자 단톡방에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해주면 좋겠냐’고 물었다. 공소시효 폐지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들을 직접 도와줄 수는 없지만 국민청원이라도 하자 싶었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서는 13살 미만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 범죄의 공소시효를 없앴다. 성인이 된 뒤 가해자를 형사처벌할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2011년 법 시행 이전 사건은 소급 적용이 되지 않는다. 피해 당시 나이가 13살 이상이어도 적용되지 않는다. 생존자들이 성인이 되어 가해자를 고소하고 싶어도 고소할 수 없다. 사과를 요구해도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점을 악용해 되레 피해자를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는 일이 다반사다.
|
8월6일 회의실에서 푸른나비, 초원, 민지가 ‘#오빠 미투’ 기사가 실린 제1273호 위에 서로 맞잡은 손을 얹고 ‘파이팅’을 다짐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
“공론화 작업 이어가겠다”
푸른나비는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를 폐지하겠다는 일념으로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며 구걸하듯” 매달렸다. 그는 성인이 된 뒤 처음으로 석 달간 생업도 완전히 내려놨다. 생존자들과 머리를 맞대어 청원서 문구를 만들고 수정하기를 거듭했다. “친족 성폭력 피해자인 것이 드러날까” 겁내는 생존자들을 일일이 설득해 청원 동의를 받아내기도 했다. 시민단체를 찾아다니며 소셜네트워크에 청원 홍보글을 올려달라고 읍소했다.
그사이 대출한도는 바닥이 났고, 최종 청원 동의는 청와대 공식 답변을 받을 수 있는 20만 명에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도 푸른나비는 “‘내가 국민청원을 하려고 가정폭력 남편과 18년을 살다가 이혼했나보다’ 생각할 정도로 후회가 없고 오히려 난생처음 행복을 느꼈다”며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추가 청원 등 공론화 작업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