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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16 04:59 수정 : 2019.10.16 07:38

국가인권위원회가 2012년 여성 연예인의 인권을 위해 제작한 애니메이션 <나의 꿈은>의 한 장면. 당시 ’여성 연예인 인권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자기결정권을 침해받는 연예인의 현실을 드러냈다. 인권위 제공

외모평가·성희롱·과한 눈길…일상에서 겪는 여성혐오 투사
“당당한 설리도 못 버틴 사회 나도 불안감이 들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2년 여성 연예인의 인권을 위해 제작한 애니메이션 <나의 꿈은>의 한 장면. 당시 ’여성 연예인 인권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자기결정권을 침해받는 연예인의 현실을 드러냈다. 인권위 제공
한 여성 연예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한국 사회가 깊은 울분에 빠졌다. 14일 오후 가수 겸 배우 설리(25·본명 최진리)가 숨진 채 발견됐다는 뉴스가 보도되면서 설리와 비슷한 세대에서 비슷한 삶의 경로를 함께 밟아온 20대와 30대 여성들이 당혹감과 함께 사회에 대한 분노를 쏟아내고 있다. 설리를 향해 쏟아졌던 다양한 비난의 목소리가 사실은 같은 세대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고 있는,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허용해온 일들’이라는 공감대가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 사업자 유지은(31)씨는 설리의 죽음 소식을 접한 뒤 자신의 페이스북에 긴 글을 올렸다. “설리의 죽음이 정말 연예인의 죽음인가? 설리가 데뷔 후 겪은 모든 일들이 경중의 차이는 있겠지만 같은 여자로서 그 고통이 너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살찐 것으로 수군대며 한마디씩 하는 사람들, 남자친구 사귄 후에 들려오는 각종 성희롱적인 농담, 얇은 옷차림으로 거리를 나섰을 때 받아본 따가운 눈총 또는 과한 눈길, 불법 촬영에 대한 불안감…(중략)…설리는 사회적 타살의 피해자다.” 이 글은 올라온 지 20시간 만에 2300여개의 '좋아요'를 받으면서 공감을 얻었다. 유씨는 15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설리는 좌충우돌한 평범한 여성이고, 그럼에도 소신있는 목소리를 내던 여성이었다”며 “설리가 살아남지 못하는 사회를 보고 사회적 불안감 같은 것이 강하게 들었다”고 말했다.

직장인 전아무개(29)씨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전씨는 “설리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해체시키는 우리 사회에 중요한 예술가라고 생각했고, 여성 그 자체의 인격체로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자유를 표현하는, 그런 부분이 충분히 존중받아야 할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사람들이 설리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회에서는 온전히 여자로서 ‘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개탄스러웠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남아무개(27)씨는 “제게 이번 사건이 충격이었던 건 설리는 겉으로는 엄청 당당하고 ‘나는 나의 길을 간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설리마저도) 버텨내지 못했을 정도로 비난과 악플에 시달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외모와 복장에 대한 성희롱 발언, 각종 루머와 논란의 확대 재생산 등과 같은 집단적 ‘조리돌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특히 최근에는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당당히 밝히는 여성 연예인에 대해 비난이 집중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서지혜씨와 김옥빈씨 등 여성 연예인들이 한국 사회의 젊은 여성들이 겪고 있는 일을 소설로 재구성한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사실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증’했다가 누리꾼들로부터 ‘악성 댓글 테러’를 당하는가 하면, 걸그룹 ‘에이핑크’의 멤버 손나은씨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걸스 캔 두 애니싱(Girls can do anything·여성은 뭐든 할 수 있다)’고 적힌 휴대전화 케이스 사진을 올렸다가 역시 ‘악성 댓글 테러’를 당한 뒤 황급히 “패션 브랜드 업체에서 협찬받은 것”이라고 해명한 일도 있었다. 생전의 설리 역시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속옷을 입지 않고 찍은 사진을 올렸다가 연예 매체가 이를 앞다퉈 자극적으로 보도하고, 누리꾼들은 댓글로 성희롱 발언을 쏟아낸 일이 있었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이승한씨는 문화웹진 <채널예스> 기고에서 “연예인이 자기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며 남들의 욕망을 대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사람들이 보내던 환호성은 비수로 돌변한다. 내 욕망을 대신 살아줘야 하는 네가 왜 자아를 가지고 내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하려 하냐고, 이는 계약 위반이라고 외친다”며 “특히나 그 대상이 젊은 여자 연예인일수록 비수는 더 날카로워진다. ‘인형’이나 ‘여신’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 내 눈에 거슬리는 일 없이 마냥 내 욕망을 안전하게 덧씌우기 좋은 존재가 되어 주길 바라는 대상이니 말이다”라고 썼다.

이는 한국 사회가 여전히 여성의 주체성을 부정한 채 여성을 대상화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여성학 연구자 권김현영씨는 “그동안 여성 연예인 가운데 조리돌림의 대상이 된 이는 성과 관련해 자기 주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대중들은 여성 연예인에게 생각을 드러내길 바라는 게 아니라, 외모 등 그들이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며 “여성 연예인의 생각이 대중과 다른 생각이면 그것 자체가 범죄인 것처럼 취급했다. 애교를 부리지 않으면 화를 내는 일, 예쁘게 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과문을 써야 하는 일들이 모두 그런 사례”라고 지적했다. 이직을 준비 중이라는 최아무개(28)씨도 “물건도 아닌 사람에게 물건 포장을 바꾸듯이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를 강요하고 이 이미지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온라인에서 떼로 몰려가서 비난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소비자로서 자신의 의견을 무리하게 관철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며 “그래서 그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욕하면서 ‘여론의 권력’을 이상하게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의 중심에는 연예인을 대상으로 관음증적인 보도를 통해 클릭 장사를 하는 언론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설리의 사망 관련 뉴스를 다룰 때조차도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를 저버린 언론의 행태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앞서 <국민일보>는 설리의 사망 소식을 보도하며 ‘노브라를 주창해온 설리’라고 언급했다가 삭제했고, 연예 매체 <스포티비뉴스>는 설리의 빈소를 공개하는 기사에 ‘[단독]’이라는 표현을 붙여 분노를 샀다. 설리의 자택 내부를 과도하게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고, 주검 운구 사진을 찍기 위해 경쟁하는 기자들의 모습을 보며 ‘자살보도윤리강령’을 잊은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이어졌다.

오연서 권지담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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