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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1.29 21:57 수정 : 2012.01.30 16:32

[한겨레가 만난 사람] 프로바둑 데뷔 40년만에 우승 서능욱
“치명적 단점인 속기버릇, IT시대 바둑선 장점됐네요”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한 유명한 바둑칼럼니스트는 그의 승리를 ‘군자의 복수’에 비유했다.

‘반상의 손오공’ 서능욱(54). 한때 천재 소리를 들었던 그가 40년 만에 처음 우승했다. 14살에 입단해 승승장구하며 13번이나 결승에 오르고도 단 한 개의 우승컵도 갖지 못한 사나이. 서능욱의 우승 소식은 그래서 바둑계의 신선한 충격이자 화제였다. 그에게 12번 연속 결승전 패배를 안긴 상대는 조훈현, 비틀거리는 그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은 조훈현의 제자 이창호. 그런 비운의 서능욱이 천하의 ‘조 국수’(조훈현)를 13번째 결승 승부에서 ‘마침내’ 이기고 생애 첫 타이틀을 딴 것이다.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대입 실패 소식을 듣고, 수백만의 중년들이 흐르는 세월 앞에 작아지는 이맘때, ‘늦깎이’ 서능욱의 ‘13전14기’는 이들에게도 무언의 격려가 되지 않을까? 서 9단에게 인터뷰를 청한 이유는 그랬다.

한 잊혀진 승부사의 인생 후반전이 멋지게 만개한다면, 말 그대로 군자의 복수는 아무리 늦어도 늦은 것이 아니다.

생활리듬 빨라져 바둑계 풍토 변해
이번에 우승한 ‘대주배’도 그런 흐름

13번 오른 결승서 좌절 안긴 ‘덜컥수’
참선·요가로 고치려했지만 결국 못해

서능욱 9단이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한 대회는 지난해 12월27일 끝난 제2회 대주배(우승상금 1000만원). 45살 이상의 시니어들만 출전하는 기전이라 다소 격이 떨어진다는 평이 있긴 하지만, 서봉수(준결승), 조훈현(결승)을 연파하고 안은 우승컵이니 내용상으로 부족함이 없는 승리였다. 그는 우승 후 인터뷰에서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마음껏 기쁨을 발산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프로승부사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우승 소감은 실례지만 좀 ‘오버’ 같았습니다.

“저는 솔직히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평생 결승 문턱에서 발목을 잡곤 하던 서 명인을 넘고 올라가 조 국수를 격파했습니다. 원한 맺힌 상대를 다 이겼잖아요.”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

서능욱 9단에게 몇몇 고수들의 품평을 부탁했더니, 이창호 9단은 승부사로서의 재기보다는 ‘이창호류의 완성’을, 이세돌 9단에 대해서는 ‘더 큰 바둑을 위한 자기 수양’을 이야기했다. 신진 기예들을 두고서는 “실력차가 워낙 바늘 끝이니 이기려는 마음이 더 큰 쪽이 이길 것”이라고 ‘훈수’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그랬다. 그는 한이 맺혔다고 했다. 나이 50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승에 대한 미련을 접어야 했을 만큼 숱한 패배를 안긴 장본인들이 아닌가.

-여한이 없다는 말은 조 국수를 이겨서인가요, 첫 우승을 해서인가요?

“물론 둘 다지만, 만약 상대가 조 국수가 아니었다면 같은 우승이라도 의미가 달랐을 겁니다. 조훈현을 이길 수만 있다면 영혼을 팔아도 좋다고 여겼던 때가 있었으니까요.”

서능욱의 장인은 남자가 뭘 하든 다섯 손가락 안에 들면 된다며 중졸 학력의 프로 바둑기사를 흔쾌히 사위로 맞이했다고 한다. 지난해 말 현재 서능욱의 통산 랭킹은 5위. 장인의 통찰력이 대단했다고 할까. 그의 이름 위에는 일세를 풍미한 4명의 일인자들(조훈현, 이창호, 서봉수, 유창혁)만이 존재한다. 통산 우승 횟수는 조훈현 158회, 이창호 140회, 서봉수 30회, 유창혁 24회. 그런데 바로 밑 랭킹 5위 서능욱의 타이틀은 0. 정말 이러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 ‘영원한 2인자’에게 돌아온 건 무관의 치욕뿐. 서능욱이 마지막 결승전(1992년)에서 떠오르는 태양 이창호에게 일패도지한 뒤 무려 19년이 흐르고 나서야 1승을 기록했으니, 누군들 영혼을 팔고 싶지 않았을까….

-그날 대국의 승부처는?

“마지막 국면까지 아주 미세했는데, 조 국수도 실수할 때가 있더군요. 선수로 들여다볼 자리를 그냥 지나치길래 바로 역습을 가했지요.”

-운명론으로 말하면 13번째 실수는 조 국수 차례였나 보군요.

“그동안 실수는 내 전문이었는데, 별로 어렵지 않은 대목에서 조 국수가 실족을 했으니, 운이라는 게 있긴 있나 봅니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 말이죠. 허, 참.”

초년 고생, 남아 3대 복 중의 하나다

서능욱은 1958년 인천 부평에서 태어났다. 10급 수준의 아버지에게 바둑을 배워 초등학교 2학년 때 동네 대학생 형을 이겼다. 인천의 이일선 3단이 운영하는 기원을 거쳐 5학년 말에 한국기원 원생이 됐다.

-그 무렵부터 프로 기사가 꿈이었나요?

“저보다는 아버지가 더 열성이셨죠.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사람은 뭐든 한가지만 잘하면 된다는 주의였습니다. 내 또래 원생이 20여명 있었는데 중학교 갈 무렵 절반 정도가 공부한다며 그만둘 때도 아버지는 흔들림 없이 저를 밀어주셨지요.”

-14살 때(1972년 남산중 2학년) 입단했으니 당시로서는 바둑 천재 소리를 들었겠습니다.

“실력은 부족했는데 운이 좀 작용한 것 같습니다. 그 무렵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감옥에 있게 되었는데 면회를 갈 때마다 입단 대회가 언제냐고 물으셨어요. 그런 제 사정이 딱해 보였는지 주변에서 봐준 것 같아요.(웃음) 입단 소식을 전할 때 엄청 좋아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선합니다.”

-학교는 중학교까지만 다녔는데 바둑에 전념하려고 그랬습니까?

“진학 문제를 결정할 무렵에는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여서 누구하고 의논할 형편이 못 되었어요. 그때부터 내 먹을 것은 내가 벌어야 했거든요. 어차피 바둑으로 승부할 건데 굳이 학벌이 필요한가 싶기도 했지요. 그런데 인생을 살아보니 그게 아니에요. 학교 친구나, 동문 선후배 등속은 있는 게 좋은 거더라구요….”

약점을 알고도 못 고치는 게 진짜 약점이다

탁월한 기재로 주목을 받은 서능욱은 주변의 예상대로 성장을 거듭해 만 19살에 4단이 되었고, 78년과 79년 연속으로 기전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전에서는 당대 최고수 조훈현에게 한 수 지도를 받는 데 그쳤지만, 서능욱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비록 또 조훈현에게 가로막히긴 했지만 83년부터 86년까지 같은 기전 결승을 4번 연속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는 90년까지 무려 64회나 본선에 나갔다. 우승컵은 없어도 이 시기가 서능욱의 전성시대였다. 당시 그는 화려하고 재기 넘치는 속기에다 처절한 싸움바둑으로 유명했다. 팬만을 기준으로 하면 서능욱은 조·서(조훈현, 서봉수)가 결코 부럽지 않았다.

-화려하고 전투적인 기풍으로 유명했지요.

“승부사에게는 맞지 않는 기풍이었습니다. 승부사는 결정적일 때는 좀 비겁하고 치사해질 줄도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화려하다고 우승컵 주는 거 아니잖아요? 이기는 기술의 측면에서 보면 나는 부족한 승부사였습니다.”

그의 덜컥수는 그의 화려함만큼이나 유명한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수읽기가 빠르고 직관이 강하니 상대방의 약점이 바로 들여다보인다. 그러나 냉정한 승부사는 98%의 확실함 속에서도 2%의 위험성을 대비해야 한다. 하지만 서능욱의 손은 언제나 격언보다 빨랐다. 손오공이란 별명처럼 천변만화의 수와 예측불허의 공격성이 그의 자랑거리라면, 실족의 함정을 운명처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점은 승부사로서 그의 치부였다.

“임해봉 9단이나 조 국수도 처음엔 유명한 속기파였어요. 해설이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빨리 둔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정상에 섰을 때는 속기를 안 했어요. 반면에 같은 속기로 출발한 나는 끝내 그걸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 차이죠, 우승하고 못한 게….”

그는 이 대목에서 조금은 씁쓸해하면서도 솔직했다. 다 같은 천재형임에도 약점을 고치고 못 고친 차이가 참으로 많은 차이를 낳았다. ‘매니저를 겸했던 아내가 안타까운 나머지 손에 쥐여준 염주도 바람보다 비호보다 빠른 내 손을 묶어두지 못했다. 빠른 머리회전과 그보다 더 빠른 장풍 사이에 텅 빈 마음의 빗장 하나만 있었더라도 내 바둑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

-속기 버릇을 고치려고 노력도 많이 했겠지요?

“왜 안 했겠어요?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은 죄다 해봤습니다. 참선, 요가, 기공 등등. 그래도 못 고친 건 천성이었나 봅니다.”

영혼 팔아서라도 이기고 싶던 조훈현
세계대회 함께 출전하며 미움 사라져

꿈 가져야 비로소 부질없음도 알게 돼
욕심 갖고 넘어져도 계속 가는 게 인생

좋은 아내, 비장의 카드

조, 서에 이어 유창혁과 이창호가 등장하자 여느 기사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서능욱도 본선에 오르기보다는 바둑 해설 등 무대 주변을 돌 수밖에 없었다. 수입도 줄어들었다. 생활의 위기가 피부로 느껴지자 ‘은인자중’하던 아내가 궐기했다. 그의 부인 현인숙씨는 바둑계에서 모르는 이가 없다고 할 정도로 활달한 여성이었다. 주눅이 들어 있던 서능욱에게 그런 아내는 이른바 히든카드(?)였다.

“전화위복이 됐죠, 뭐.(웃음) 집사람이 나만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본인이 생활전선에 뛰어들더군요. 바둑티브이(TV) 광고영업, 복합상영관 광고대행사업, 금연초 사업 등 하는 일마다 성공했어요. 성격이 좋은데다, 나를 안타깝게 여긴 바둑팬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중년남들의 로망이 셔터맨인데, 부럽습니다.

“하하, 집사람은 내가 지고 돌아오면 그래요. 기력은 예전보다 좋아진 것 같은데, 배가 불러서 지는 거지?”

-결혼할 때 학력이 문제가 안 됐나요?

“전혀. 집사람은 대학 나오고 쫓아다니는 남자들도 많았지만, 바둑 잘 두고 술 담배 안 하는 나를 골랐지요. 장인은 남자는 무엇을 하든 다섯 손가락 안에만 들면 처자식 안 굶긴다고 했어요. 다리를 놓은 큰동서는 내 광팬이었고.”

내리막길에도 평지는 있다

서능욱은 전성기 시절 12번이나 조훈현에게 결승에서 졌다. 한때 조훈현에 대한 그의 감정은 미움 그 자체였다. 둘이 맞붙은 어느 대국이었던가, 서능욱은 예의 그 덜컥수가 나왔다. 아차 싶어 잽싸게 돌을 거둬들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기록원도 못 보고 조 국수도 무표정했다. 국면은 유리한 상황.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10여분을 묵묵히 앉아 있다가 돌을 던지고 나와버렸다. 프로바둑에서 물리는 것은 실격패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이 모른다고 해서 다시 두는 것은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더욱이 상대는 ‘철천지 웬수’ 조훈현이 아닌가.

가장 기억에 남는 승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굳이 이 대국을 끄집어냈다.

-조 국수에게만 결승에서 12번을 졌는데, 그 정도면 인간적으로도 아주 미웠겠습니다.

“저, 정말 조 국수가 미웠습니다.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그런가요?

“아니죠. 지금은 형으로 모시고 친하게 지내지요.”

그가 조훈현에 대한 ‘미움’을 털어낼 수 있었던 건 ‘돈욕심 반 애국심 반’이었다.

“90년대 초반 한 세계대회에 대표팀으로 같이 출전했는데 조 국수 덕분에 우승해서 1000만원을 상금으로 받았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시의 나한텐 큰돈이었어요. 그때 ‘아, 저 인간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때도 있네’ 하며 좋아했지요. 그 뒤로도 단체전을 하면 우리 편이잖아, 응원을 안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다 보니 조금씩 미운 마음도 풀어지더군요.”

-기재에 비해 시대를 잘 못 만났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요?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내 실력이 못 따라주고, 내 그릇의 크기가 그것밖에 안 되니 번번이 역전패를 당한 거지, 상대하고는 상관없지요.”

-아무리 그래도 통산 1000승을 눈앞에 둔 랭킹 5위가 타이틀이 하나 없었다니, 실력만으로는 설명이 잘 안됩니다.

“하긴 뭔가 있기는 있지요? 조물주가 넌 안 돼 그랬는지,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았는지. 저, 앞으로 주역이나 풍수를 공부해볼 생각입니다, 진짜.”

세상은 변하고 기회는 온다

속기 버릇을 못 고쳐 망한 서능욱의 이름이 팬들의 뇌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여길 무렵, 세상은 또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사이버 속기바둑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의 생활리듬은 더욱 빨라졌다. 바둑계의 풍토도 따라서 변했다. 오랜 시간을 쓰는 시간제 기전보다는 속기전을 선호하는 방송과 스폰서들이 늘어났다. 바둑팬들이 많은 베이비붐 세대의 향수도 시장을 키우고 있다. 속기이며 전투적인 기풍으로 올드팬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던 속기파 서능욱에게 유리한 국면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 흐름과 함께 기전의 형식도 빨라지니까 속기파들에게 아무래도 도움이 되겠지요. 옛날에는 장고파들과 붙으면 시간싸움에 스스로 무너지곤 했는데 그런 일은 줄어들겠지요? 이번 대주배 우승도 그런 흐름의 하나가 아닐까요.”

-안 하던 술을 배웠다던데….

“사실 지천명(50살)을 넘기면서 우승에 대한 미련을 접었습니다. 승패를 떠나니 금주를 계속할 이유가 없더군요. 그동안 못 마신 총량을 채워야죠. 하하.”

-남자 나이 50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모르겠어요. 그 전에는 내가 한번도 우승을 못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 맺힌 마음을 접으니까, 또다른 마음이 열려요. 지천명. 자기 주제를 안다는 거 아닙니까? 회광반조(回光返照·불꽃이 꺼지기 전에 한번 반짝하는 상태)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러면 어때요?”

-운이든 실력이든 인생 후반전이 제대로 열린 것 같습니다. 제2의 전성기가 열릴 조짐을 느낍니까?

“저도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 기예들한테는 버겁겠지만, 시니어 기전에서는 누구와도 해볼 만합니다. 물론 상대들도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대부분 속기전 아닙니까?”

-스스로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하면?

“나이가 먹어가면서 스스로 느끼는 것은 사고가 많이 유연해지는 겁니다. 세상 보는 눈, 사람 보는 눈이 넓고 깊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욕심을 접은 탓이고, 어떻게 보면 달관인데 그런 마음의 여유가 반면에도 나타나나 봅니다.”

-인생 후반전의 목표는?

“기량이 전보다 나아지고 있다는 걸 느끼기 때문에 그에 맞는 성적을 내고 싶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또 할 수만 있다면 바둑으로 뭔가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내가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찾는 중이니, 제 팬들은 제게 좀 알려주세요.”

40년 만에 우승한 사람으로서, 실패의 고통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청하자, 서능욱 9단은 이렇게 말했다. “욕심을 버리지 마세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뭘 채울 수 있지 않을까요? 꿈을 가진 뒤에야 비로소 부질없음도 알게 되는 것. 처음부터 ‘난 안 돼’라고 하면 열리는 것이 없어요. 인생은 도전의 연속. 한번 넘어졌다고 끝이 아니죠.”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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