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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5.02 19:13 수정 : 2005.05.02 19:13

“야구 제대로 즐기는법? 오심의 재미를 느껴봐!”

“취미를 직업으로 연결해서 한평생 잘 써먹었으니 좋은 인생이었지요. 건강이 안 좋지만 ‘예스, 콜 잇 어 라이프!(Yes, call it a life!)라고, 내 인생 이것으로 됐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29일, 퇴임식날 사무실에서 만난 이종남(52) 전 <스포츠 서울> 이사의 얼굴은 밝았다. 폐암 3기 투병 생활 중이었지만 그늘이 없었다. 여러 차례 “밝은 톤으로 기사를 써달라”며 웃었다. 1979년부터 야구 기자 생활 26년, <한국 야구사> <야구란 무엇인가> 그리고 최근 펴낸 <종횡무진 인천야구>까지 역서와 저서 20여 권. 야구계에선 그를 ‘최고의 야구기자’이라고도 부른다.

“돌아보면 다 엉터리지만 책 쓰는 재미로 산 것 같기도 해요. 제 전공이 사학인데 친구들이 ‘야구 역사책을 그렇게 많이 썼으니 어쨌든 전공 살렸다’고 합디다. 허허~.”

희로애락 영고성쇠가 인생과 꼭 닮아 야구가 좋다는 그는 한국 프로야구 24년사 최고 하이라이트로 이광환 당시 엘지 감독(현 엘지 2군 감독·이 전 이사는 그를 ‘숭배’한다고 했다)이 일군 1993년 한국시리즈 제패를 꼽았다.

“임기 3년 동안 소신에 따라 자율야구를 관철해 만든 하나의 드라마였죠. 단일 팀으로 처음 100만 관중을 넘기고, 김재현-유지현-서용빈이란 오빠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이야 상식이 됐지만 선발-중간-마무리로 이어지는 투수 분업화를 도입한 것도 이 감독이 처음이었어요. 프로야구가 한 단계 올라서는 데 선도적인 구실을 했죠.”

인생에는 아쉬움이 없다던 그였지만 야구엔 아쉬움이 많았다. “기술적으로는 엄청나게 발전했어요. 일본은 거의 따라 잡았고, 미국에도 많이 진출해 있죠. 하지만 경기장 시설은 그대로에요. 지금 대부분의 구장은 미국 마이너리그 싱글 에이(A) 정도도 안 돼요. 잠실, 문학 등도 트리플 에이를 넘지 못하죠. 구장 현대화는 관중 동원과도 직결되는데 그동안 너무 성적에만 매달렸어요. 그리고 선수들도 광고맨이 돼야 해요. 싸인도 잘 해주고, 매표소 같은 데서 ‘야구 좀 보러 오십시오’라고 나서야해요. 스타다운 품격도 갖춰서 팬들이 ‘우리 애도 저렇게 키우고 싶다’고 말할 정도가 돼야죠. 그런 면에선 연예계보다 많이 뒤떨어집니다.”


어찌하면 제대로 야구를 보느냐는 물음에는 이렇게 답했다. “야구 7, 8단인 팬들은 정말 많아요. 하지만 입신의 경지라는 9단에 이른 팬은 적습니다. 9단이 되는 길이 하나 있죠. 바로 심판의 오심을 야구의 묘미로 소화하는 겁니다.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실책하고 감독이 머릿속에서 실책 하듯, 심판도 실책을 합니다. 그게 오심이에요. 실책 없는 야구는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일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야구장을 찾을 거라는 이 전 이사는 “야구계가 내게 해준 게 너무 많다”며 “여력이 된다면 다시 한번 좋은 야구 책 하나 더 써보고 싶다”고 환하게 웃었다. 그 환한 선배 기자의 웃음에 자꾸 가슴이 저려온다. 글·사진 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이종남은..

이종남 전 이사는 천일평씨와 함께 대표적인 1세대 프로야구 기자다. 서울대 재학시절엔 학교 대표 야구선수(좌익수)로 활약했다. 그가 펴낸 20여 권의 야구 관련 책들은 공부하는 야구인이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가 됐다. 프로야구가 20돌 되던 2001년 한국야구위원회(KBO)는 공로상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상일 케이비오 사무차장은 “그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초창기 프로야구 역사와 기록이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소식 대한야구협회 부회장은 “그 사람 자체가 야구”라고 말했다. 인천이 고향으로 서울대 야구부 출신인 그는 최근 야구 도입 100돌을 맞아 <종횡무진 인천야구>를 펴냈다.성연철 기자 sych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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