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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09 20:16 수정 : 2018.05.09 23:38

게티이미지뱅크

[ESC] 곽정은의 단호한 러브 클리닉

게티이미지뱅크

Q 안녕하세요. 저는 22살로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 여학생입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연애에 대해 고민이 너무 커서 사연을 꼭 보내고 싶었어요. 남자친구는 제가 스무살이 되었을 때 소개를 받아 만나서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와 지금까지 3년째 연애 중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며칠 전 헤어진 상태고요. 제가 헤어지자고 통보를 했거든요.

저희는 웃음 코드가 잘 맞고, 이야기도 잘 통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싸우지도 않았고요. 저는 그와의 연애가 제대로 된 첫 연애였습니다. 초반부터 남자친구를 많이 좋아해서 표현도 그보다 많이 했어요. 남자친구는 과거 연애 때 안 좋은 기억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를 지켜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고, 점점 좋아졌다고 했죠.

그렇게 연애를 이어오다 500일 때 남자친구가 큰 일을 저질렀고, 제게 들켰습니다. 남자친구의 휴대전화를 보게 됐고, 일주일 정도 어떤 여자와 메시지를 주고받은 사실을 알게 됐죠. 남자친구는 계속 거짓말을 하다, 제가 헤어지려고 하니 솔직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를 만나기 전 고등학생 때 여자친구를 사귀었는데, 임신이 됐다더군요. 결국 전 여자친구는 낙태를 했다고 합니다. 남자친구는 임신과 낙태로 인해 다투면서 사이가 안 좋아져 헤어지게 됐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러다 그 일이 너무 미안해서 밥을 한번 같이 먹자고, 저 몰래 전 여자친구에게 연락을 했다고 했어요. 제가 모든 사실을 알면 충격받고 싫어할까 말을 못하고 있었대요.

제가 전 여자친구에게 직접 연락을 해서 남자친구가 이야기한 일에 대해 물었습니다. 연락이 왔었고, 사과도 받았지만 만나지는 않았다고 했어요. 너무 충격적이었고, 화가 많이 났지만 남자친구를 정말 좋아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가끔 생각나고 남자친구를 믿는 것이 힘들어졌어요. 괜히 불안감이 커져갔습니다. 지금은 군대에 있는 남자친구가 휴가를 나와 친구들과 여행을 간다고 하면 보내기가 싫어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스스로 남자친구를 대하는 제 모습을 바라보니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민이 더해지는 지점은 남자친구의 친구들이 소문이 안 좋다는 점이에요. 자기들끼리 연락한 것을 보면 이상한 이야기가 있는데, 남자친구는 다 장난으로 하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 이제 사귄 지 3년이 다 되었는데 그 예전 일을 자꾸 떠올리게 되고요. ‘몰래 전 여자친구에게 연락을 한 건 바람을 피운 거 아닌가?’ ‘3년을 사귀는데 아직도 괜찮은 사람인지 의문이 들면 이상한 게 아닐까?’….

‘아닌 건 아닌 거다’라고 생각을 정리해 이별 통보를 했습니다. 남자친구는 제가 없으면 안 된다, 정말 좋아한다, 제발 한번만 믿어 달라고 합니다. 울면서 이야기하더군요. 우는 모습도 처음이고, 저도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 믿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만나지 않고, 연락만 이어가고 있는 상태예요.

그런데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을 다시 만나도 될지,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 친구들은 다시 만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연애한 뒤 1년이 넘도록 전 여자친구와의 일을 숨기고, 저를 속이고 만나려고 했다는 게 말이 되냐는 겁니다.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사실을 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요. 게다가 제가 우연히 알아버려서 확인을 하게 된 거라면 다시 사귀게 된다 한들 계속 힘들 거라고 합니다. 곽정은 작가님이 방송에 출연해 하시는 말씀이 떠올랐어요. ‘연애를 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면 계속 해보라’는 내용이었죠.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을 만나는 게 좋을까요?

아직 헤어지지 못한 여자


A 사랑이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혹은 기대하는 대로 흘러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사랑은 그렇지 않아요. 처음엔 그런 듯 보여도 곧 얼마쯤의 시간이 지나면 그 쓸쓸하고 초라한 맨얼굴을 드러내는 것이 사랑이 아닌가 싶고요. 당신의 이야기를 받아들고 전 이 첫줄을 쓰기까지 오랜 시간을 망설였습니다. 네, 사연의 디테일이 조금 다를 뿐 당신의 사연과 내가 경험한 일은 그리 다르지 않네요. 기대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고, 알면 알수록 초라해지는 상대방의 어떤 것들을 보아 버렸다는 점에 있어서요. 고로 이 답장은, 당신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그리고 우리와 비슷한 일을 경험한 많은 이들에게 보내는 것이기도 할 겁니다.

자, 당신의 마음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솔직히 얼마나 충격이었겠어요? 웃음 코드가 잘 맞았으니 함께 참 행복하게 많이 웃었을 테고, 좋아한다는 표현도 많이 했던 그런 사람인데요. 그런 사람이 알고 보니 전 여자친구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도 있었고, 나와 사귀는 동안에 몰래 그 여자를 만나려고 연락까지 했으니까요. 실망하는 것도 당연하고, 자꾸만 의심이 드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죠.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는 도저히 사랑할 수 없고, 그런 상태에 놓인 자신에 대해서도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없겠죠. 이런 상황이 괴로우니까, 그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을 겁니다. 이건 더 이상 행복한 연애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생겨난 겁니다. 당신은 분명히 당신의 모습을 기준으로 어떤 결정을 내렸어요. ‘이대로는 내가 행복할 수 없겠다’ ‘나의 변해가는 모습이 내 맘에 들지 않으니 이 만남은 그만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요. 이때 당신이 내리는 판단은 철저히 나라는 사람을 중심에 두고, 나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거죠. 이렇게 판단할 수 있을 땐 솔직히 친구들의 조언도, 그 어떤 전문가의 조언도 필요 없어요. 당신을 가장 존중하는 방식, 당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어주는 방식은 세상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잘 알 테니까요.

그런데 당신이 지금 흔들리는 이유는 뭔가요? 판단을 하는 기준이 당신을 떠나 외부의 어떤 것들에 머물 때, 당신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붕 뜬 상태로 괴로워지고 있는 게 보이지 않나요?

남자친구가 전 여자친구에게 연락을 했으니 그건 바람일까 아닐까, 3년을 사귀는데 아직 괜찮은 사람인가 아닌가 모르겠다, 남자친구가 이렇게 울면서 사과하는데 믿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건 당신의 고민 같지만 사실 당신의 고민이라고 할 수 없죠. 그냥 그를 반복적으로 재단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의 행적, 그의 신뢰도, 그의 눈물, 그를 판단하고 평가한 결과에 주목하는 순간 당신은 흔들리게 되는 게 보이지 않나요? 물론 이 과정이 아예 불필요한 건 아니에요. 당신의 입장, 그리고 감정을 알기 위해선 그의 행동을 되짚어보는 것이 꼭 필요했겠죠. 하지만 그 사건이 일어난 후로도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이 과정을 반복하고 되새김질하고 있는 것이 문제인 거고요.

세상 모두가 ‘그 정도는 용서해줘도 되지 않나’라고 말한다고 해도, 당신이 용서하거나 감당할 수 없다면 그건 용서하지도 감당하지도 않는 것이 맞아요. ‘이건 내가 참을 수 없고, 참아서는 안 되는 일이야’라고 자신을 위하고 존중하는 선택을 하고도 당신은 지나간 과거를 계속 되짚고 있네요. 네, 자신이 시간과 노력을 들였던 관계가 무너져 버리는 일 앞에서, 손실혐오(동일한 양의 이득보다 손실을 더 충격적으로 느끼는 심리)를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죠. 그동안 들인 시간이 아까워 미적거리는 동안, 당신의 소중한 1년 반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네요.

당신 스스로 목소리를 믿으세요. 비단 이 연애뿐만 아니라,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남의 말대로 하는 것보다 처음엔 좀 고통스럽겠지만, 그 결과는 훨씬 값지죠. 자기 내면의 목소리대로 결정하는 사람은 자신과 더 좋은 관계를 맺게 되고, 그러므로 그 선택 이후에 그는 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결정들이 모여 당신의 인생을 만들겠죠. ‘그런 사람을 어떻게 만나냐?’는 친구들의 조언도, ‘연애를 하는 내 모습이 맘에 들면 계속 해보라’는 제 조언도 사실 다 필요 없어요.

당신은 이미 강하고, 당신 스스로를 존중하는 선택을 감행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단호하게 이별하고, 자신의 선택에 만족하는 그 기쁨을 만끽하길 바라요.

곽정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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