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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24 09:55 수정 : 2018.05.24 16:34

클립아트 코리아.

[ESC] 곽정은의 단호한 러브클리닉

클립아트 코리아.

Q 두 살 어린 남자 친구가 있어요. 급한 제 성격도 다 맞춰주고 강한 제 주장에도 한결같이 “그렇구나~ 네 말이 맞다~” 모드로 공감해주는 착한 애인입니다. 더구나 책임감도 강해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상의하면 잘 들어주고 현명한 해결책도 제시하는 편입니다. 제 친구들도 그런 남자친구를 칭찬해요. 제 친구들까지 예의 바르게 챙기는 모습은 참으로 멋져 보이지요. 다정다감하고 상냥한 그는 끊임없이 저와의 미래를 꿈꾸며 결혼하길 원해요. 그 친구만 보면 ‘결혼? 그까짓 것 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접습니다. 그의 부모님을 보면 고개를 세차게 흔들게 되거든요. 이런 갈등을 한 지 꽤 오래 되었어요. 갈팡질팡하고 있죠.

특히 그의 어머니는 ‘아들 바보’를 넘어 ‘아들=그녀’로 생각하며 아들을 살아가는 이유로 생각합니다. 아들과 연락이 안 되거나 아프면 전전긍긍 앓아 누워요. 드라마 속 어머니들처럼 머리 띠를 두르고 누우십니다. 저에 대한 애정도 넘치는데 그것도 아들이 절 만나서 긍정적으로 많이 바뀌고 더 성실해졌기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 늦게 들어가거나 조금이라도 안 좋은 모습을 보이면 돌변하곤 해요. 남자 친구에게 애정이 가다가도 그런 일련의 모습을 볼 때마다 소름이 돋아요.

또 하나의 문제는 종교예요. 그 집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데 집안의 종교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며 제게 교회 모임에 나가보는 게 어떠냐고 자꾸 권하십니다. 일요일에 데이트 약속 잡기도 힘들어요. 주말엔 가족이 다 같이 교회에 가야 하거든요. 전 종교는 평생 갖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입니다. 남자 친구가 교회 다니고 싶으면 그러라고 합니다. 종교는 자유니까요. 그리고 제게 강요는 하지 말라 당부합니다. 남자 친구는 제 성격을 알아서 “알겠다”고 하는데 믿을 수 있나요. 막상 결혼하고 나면 부모님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제게 강요할 거 같아요. 착한 아들이니까요. 그 집 부모님도, 종교도 부담 그 자체예요.

더 끔찍한 문제가 있어요. 전 딩크족(자녀를 의도적으로 갖지 않는 맞벌이 부부)을 지향하는 사람인데, 남자 친구 어머니는 “너희들 결혼은 언제 하니? 애를 낳으면 내가 다 키워줄 테니 낳기만 해라. 나이도 어리지 않은데 얼른 가져야지. 동물 키우는 건 안 된다. 난 외로워도 동물은 싫다. 애기 키우고 싶다” 등의 말로 절 몹시 불편하게 해요.

남자 친구만 보면 둘 관계에는 큰 문제는 없지만 그의 주변을 보면 하나같이 마찰과 장애물이네요. 남자 친구에게 ’미안하지만 너희 집, 부모님 다 부담스럽다. 헤어지자’고 한 상태예요. 그랬더니 남자 친구가 “걱정 마라. 결혼은 어차피 우리 둘이 사는 거다. 내가 잘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하는 겁니다. 남자 친구가 다정한 목소리로 그런 얘기를 하면 살짝 마음이 흔들리기도 해요. 어찌 해야 할까요?

남자 친구의 부모와 안 맞는 여자


A 착하고 현명하고 책임감이 강한 두 살 연하의 남자친구라니, 아주 좋네요. 게다가 그 남자가 먼저 당신과 함께 하는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다니 더욱 좋고요.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그렇듯 단순하고 수월하게 흘러가지만은 않네요. 행복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으면 좋았을 이 시간을, 당신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가득 채우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걱정과 불안이 타당한가에 대한 질문을 해본다면 상황은 좀 달라지죠. 아무 이유 없이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당한 이유와 근거가 있으니까요. 자신의 눈으로 지켜본 상황들은 분명 '이 결혼은 절대 안 돼'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의 달콤한 말들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했던 굳은 생각들도 스르륵 녹아 버리는 것 같고, 그렇겠죠? 착하고 현명하고 책임감 강한 남자친구니까, 이렇게 흔들리는 것도 당연하긴 할 거예요.

하지만 이제 조목조목 살펴 봐야 할 시간이죠. 엉켜 있는 실타래 같은 생각을 제대로 풀지 않으면 진짜로 인생이 엉키게 되거든요. 일단 지금 가장 주목해야 하는 건 그의 말이 아니라 행동이에요. 아무리 착하고 괜찮아 보이는 사람도 정말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임기응변식의 거짓말을 하는 법이거든요. '결혼은 어차피 우리 둘이 사는 거야. 내가 잘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말을 하는 그 남자의 '행동'을 보자고요. 그의 어머니가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당신에게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얼른 낳기만 해라', '동물은 싫다, 아기를 키우고 싶다'고 말할 때 그는 그 상황에 어떻게 행동했는지 기억하나요? 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해도 아직 당신은 그의 여자친구일 뿐이고 손님일 뿐인데, 부부 사이에서 결정해야 마땅한 이야기들을 아무렇지 않게 강요하는 어머니의 말들에 그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말이에요. 정말로 '내가 잘 하겠다'라는 말을 지킬 수 있는 남자라면, 그런 상황에 이미 적절한 말로 대처했겠죠. “우리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그때 그 당시에 할 수 없는 남자가, 나중에는 과연 할 수 있을까요?

종교에 대한 문제 역시 마찬가지죠. 당신이 무교이고, 종교를 강요하지 말라고 이미 당신은 당부의 말을 했지만 결과는 어떤가요? 당신에게 교회 모임에 나가 보라고 이미 권유가 이어지고 있죠? 말이 권유이지, 이건 친절함을 뒤집어쓴 강요에 가깝죠. 아직 결혼한 상황도 아닌데 종교에 대한 강요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그는 당신을 위해 어떤 액션을 취했던가요?

어쩌면 그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독립적인 인간이 아닐 수 있습니다. 연인으로서 보여주는 제한적인 모습 안에서는 제법 책임감 있고 현명하며 착하기까지 할 수 있겠지만, 네, 그건 연인으로서의 모습일 때 뿐이죠. 아들로서의 그는, 부모님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권하든 한 번도 그걸 거슬러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무척 높아 보이네요. 이렇게까지 넘겨짚고 싶진 않지만, 어쩌면 그가 당신의 성격을 늘 맞춰주고 공감해줄 수 있었던 건, 그가 누군가에게 한 번도 제대로 반대 의사를 밝혀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지도 모르죠. 한 번쯤 물어보세요. 부모님에게 단 한 번이라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해요'라는 의사를 밝혀본 적이 있는지 말이에요. 그저 착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당신에게도 착한 애인일 수 있었다면, 결혼을 하는 순간 그 착한 애인 노릇은 종료될 겁니다. 당연한 수순이지 않겠어요? 당신이 인지했던 그의 정체성이란, 사실 '착한 아들'이라는 정체성에서 비롯한 허상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니까요. 효자인 남자와 결혼하는 건 두 번 세 번 생각해봐야 한다는 숱한 결혼 선배들의 ‘카더라 통신’은 뜬금없이 생겨난 게 아닌 거죠.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한 인간의 정체성이란, 정말 인생을 뒤흔드는 큰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나저나, 남자친구만 보면 둘 관계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하셨죠? 제가 보기엔 이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 같은데요. 당신이 아직 결혼하지 않았는데도 어떤 강요와 간섭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는 이 상황에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이니까요. 당신이 한 인간으로서 가져야 마땅한 종교의 자유, 당신 신체에 대한 주체적 권리를 깡그리 무시하는 말을 듣게 된 이 상황에도 그는 그저 '내가 잘 할게'라는 애매하고 뭉툭한 말로 당신을 안심시키려고 하니까요. 책임감 있는 남친이라면, 글쎄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네요.

긴 말 하지 않을게요. 당신이 한 명의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할 것이 뻔한 곳으로 가지 말아요. 한 명의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해도 괜찮을 만큼 그를 사랑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을 얻어냈을 땐 정작 상대방이 나에게서 사랑을 거두어 버리더라고요. 인생에 정답은 없을지 몰라도, 절대 피해야 할 오답은 분명히 있지 않나요? 자, 탈출해요 어서 빨리!

곽정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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