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2.07 09:39
수정 : 2018.12.07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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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번> 전시 설치 전경. 사진 김연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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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의 낙서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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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번> 전시 설치 전경. 사진 김연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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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전시는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공간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그러고 보면 전시는 작가 혼자만 하는 게 아니다. 작품이 모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은 공간과 호응한다. 그러므로 공간이 개입된다. 작가는 어쩌면 작품 제작 이전에 공간을 먼저 떠올려야 할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할 때 미술이 시와 다른 점이 바로 이거다. 시는 자체로 공간이 되지만, 미술은 공간과 함께 공간을 만든다. 그래서 큐레이터라는 존재가 등장한다. 큐레이터는 공간을 이해시키는 사람이다. 그 공간을 더 폭넓게 상상하도록 돕기 위해 작가와 작가를 연결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그룹전’이라는 개념이 생긴다. 좋은 전시라면 대략 이러한 흐름을 따른다고 믿는데, 물론 사견이다.
그래서 어떤 전시는 큐레이터가 궁금해진다. 흔한 일은 아니다. 특히 2인 이상의 작가가 함께 전시하는 경우에 더 그렇다. 공간과 작가, 작품과 공간, 작가와 작가가 어우러지며, 동시에 낯선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전시를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큐레이터 입장에서 2명 이상이 참여하는 전시를 준비하는 건 다른 전시를 준비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 ‘대체로’ 작가란 다른 대상을 별로 배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는 공간을 감안은 하지만, 그 공간을 이기려고 한다.(그는 결국 진다!) 또 어떤 작가는 함께 전시하는 작가와 그 작가의 작품이 지닌 힘을 감안은 하지만, 그럼에도 머릿속에는 온통 자신의 작품에 대한 생각뿐이다. 그런데 이건 작가에게 뭐라고 할 사안은 아니다. 작가는 원래 제멋대로인 존재니까. 그 힘으로 미지의 세계를 구체화시키는 거니까. 그러니까 돌고 돌아서 내 결론은 큐레이터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아트선재센터에서 김세은·박민희·정지현의 전시 <하루 한 번>이 열리고 있다. 2명 이상이 함께하는 전시다. 보도 자료에 ‘한 공간에서 회화, 조각, 소리로 경험하는 감각’이라고 적혀 있다. 이 문장이 얼마나 광활하고 쓸쓸한 것인지 이제 알겠지? 심지어 회화와 조각을 어우러지게 하는 것도 어려운데 소리까지? 게다가 이 전시에서의 소리란 ‘가곡’이다. 그냥 가곡도 아니고 실험적인 사운드가 많이 가미된 가곡이다.
나는 이 전시를 보고 들으며 감동을 받았다. 우선 김세은의 대형 평면 회화 작품 ‘무제’는 공간을 압도한다. 이 회화에서 드러나는 운동성, 어떤 힘에 대한 감각적 분할은 그대로 정지현의 설치 작품으로 이어진다. 이어진다는 표현이 온전하지 않다. 두 작가의 작품이 서로 힘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7m 대형 간판 폐기물을 반으로 잘라 만들었다는 작품 ‘더블 데커’가 특히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 두 명의 작가가 천장의 재질, 형광등 빛, 둥근 기둥 등, 공간은 이루는 요소들을 섬세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는다. 좋은 전시는 보이지 않는 괄호들을 둥둥 떠다니게 하는 법이다. 그 괄호 안을 박민희의 <가곡실격: 한바탕>이 채운다. 큐레이터가 누굴까? 내년 1월20일까지,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조화의 마법을 감상할 수 있다.
이우성(시인·미남 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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