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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2 10:16 수정 : 2020.01.02 10:22

지난 12월27일 함백산 정상에서 본 해돋이. 김선식 기자

커버스토리 | 눈꽃 여행

새벽 ‘홀로’ 산행에서 들린 짐승 소리에 떨고
함백산 칼바람에 손가락·머리카락 얼어붙어
새파란 하늘 아래 새하얀 상고대 핀 ‘겨울왕국’
만항재~두문동재 7.68㎞ 해맞이 눈꽃 여행

지난 12월27일 함백산 정상에서 본 해돋이. 김선식 기자

새까만 하늘에 별들이 총총 반짝였다. 지난 12월27일 새벽 5시20분.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민박집에서 만항재(해발 1330m)로 가는 길이었다. 체감온도 섭씨 영하 14도, 길 위에 온기를 담고 있는 건 나와 별뿐이었다. 도보 30분 거리를 가로등 2개가 멀찍이 떨어져서 비췄고, 정작 등산길 들머리엔 가로등이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옅은 공포가 밀려왔다. 아이젠(등산화에 덧대 신는 미끄럼 방지용 철제 그물)을 끼우며 허둥대는 나 자신이 우스꽝스러웠다. 별을 올려다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해맞이 눈꽃 산행 여행지’로 함백산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예로부터 왕들은 태백산 천제단에서 하늘에 제를 올렸다. 함백산 기원단은 민초들이 소원을 빌었던 곳이다. 그 보편성에 끌렸다. 함백산은 태백산 국립공원에 있지만, 태백산보다 높다.(해발 1572.9m) 국내에서 6번째로 높은 함백산은 한라산, 태백산, 소백산만큼 설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리하여 만항재~함백산 정상~중함백~은대봉~두문동재 약 7.68㎞를 걸어 오르내리기로 했다.

꿈결 같은 시간이었다. 전날 내린 눈은 소복이 쌓였고, 밤사이 눈은 그쳤다. 바람도 잔잔했다. 벌써 파란 하늘과 상고대(나무나 풀에 내려 눈처럼 된 서리)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침 5시55분, 등산길 들머리를 지나 깜깜한 산속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은가루처럼 반짝이는 빛을 봤다. 눈꽃을 빗댄 말이 아니다. 작은 나무에 앉은 상고대와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에서 유독 빛나는 점이었다. 모래알 사이에서 반짝이는 은빛만큼 작은 결정체였다. 등산길조차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 빛에 빨려 들어가듯 걸음을 뗐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소리를 들으며 발걸음도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설산에 들어온 지 20분쯤 지났을까.

지난 12월27일 중함백에서 은대봉 가는 길에 만난 파란 하늘과 상고대 맺힌 나무들. 김선식 기자

알 수 없는 짐승 소리가 들렸다. ‘크으으으 크으으으’ 왼쪽 길가에서였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눈 밟는 소리 말곤 제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길 기원하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걸었다. 어느새 짐승 소리는 사라졌다. 두려움에 현혹돼 눈 밟는 소리에 스스로 놀란 것은 아닐까? 이날 산행을 마치고 김상구 태백시 문화관광해설사에게 물어봤다. 그는 지난 8년간 함백산, 두문동재, 태백산 일대 숲 해설을 했다. “멧돼지 같은 맹수들은 크게 울지 않아요. ‘크으으으’ 그 소리는 멧돼지 소리가 맞습니다.” 김 해설사는 덧붙여 주의를 당부했다. “멧돼지는 야행성이라 어두울 땐 만날 확률이 더 커집니다. 혼자 야간 산행하는 건 무리예요. 절대 하지 마세요.” 등산길 들머리부터 50분 정도 걷자 함백산 기원단이 나왔다. 바위를 촘촘히 올려 쌓은 커다란 우물 모양이다. 기원단을 빠져나가면 도로변이다. 태백산 국립공원 표지판이 달린 출입문이 보인다. 함백산 정상으로 가는 문이다.

지난 12월27일 함백산 정상에서 중함백으로 내려가는 길. 김선식 기자

멋모르고 떠난 새벽 ‘홀로’ 산행은 턱없이 준비가 부족했다. 랜턴을 챙기지 않았고, 등산 스틱은 길이 조정 장치가 고장 나 있었다. 아이젠과 스패츠(양말 안으로 들어오는 눈을 막으려고 발목부터 무릎 사이를 두르는 각반), 귀마개와 넥워머(목을 따뜻하게 하려고 두르는 원통형 천)를 챙긴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랜턴 대신 조명 앱을 켠 스마트폰을 넥워머에 끼워 발 앞을 비췄다.

여명이 스며들었다. 아침 6시55분, 가파른 오르막 산길에서 속도를 올렸다. 지평선은 점점 붉게 물들고 있었다. 눈과 상고대가 내려앉은 나뭇가지들도 불그름한 빛이 감돌았다. 바삐 산을 오르며 자주 뒤를 흘끔거렸다. 동트기 전 꼭대기에 올라야 했다. 해돋이 예정 시각은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기준 아침 7시34분. 오르막길에서 난데없이 해돋이를 맞을 순 없었다. 강추위를 뚫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올랐다. 정상에는 세 사람이 있었다. 사람이 이렇게 반가운 적이 없었다. 짐승 소리와 추위에 떨며 외로움이 사무쳤나 보다. 첩첩 설산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한 그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취미로 산 사진 찍으러 다니는 이들이었다.

지난 12월27일 함백산 정상에서 해돋이를 바라보는 여행객. 김선식 기자

산 정상 바람은 매서웠다. 특히 원형 돌탑과 표지석이 있는 함백산 최고점에선 칼바람에 몸이 흔들려 뒤뚱거릴 수밖에 없었다. 땀에 흠뻑 젖었던 머리카락은 강력 스프레이를 뿌린 것처럼 얼어붙었다. 카메라 셔터를 5분 넘게 누를 수 없었다. 손가락은 금세 얼어 감각을 잃었다. 드디어 해는 머리를 들어 올려 대지를 비췄다. 구름은 봉우리 사이에 안겨 쉬고 있었다. 함백산을 둘러싼 태백산, 장산, 백운산 산줄기는 주먹처럼 단단한 산세를 뽐냈다. 같이 있던 세 사람은 모두 만항재 쪽으로 내려갔다. 또다시 나 홀로 중함백(해발 1505m)으로 향했다.

태초의 파도와 바다, 하늘과 구름을 보고도 그랬을까. 흰색과 파란색은 원시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시릴 만큼 파란 하늘과 새하얀 상고대를 보며 아무도 없는 설산 길목마다 나도 모르게 ‘와아’ 탄성을 내질렀다. 현실 세계에 ‘겨울왕국’이 있다면 ‘바로 여기’라고 생각했다. 함백산에서 중함백에 이르는 길은 죄다 상고대 터널이다. 들머리부터 주목이 가지를 비틀고 사람처럼 서 있다. 덥수룩하게 자란 할아버지 수염처럼 상고대가 피었다. 주목은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단단하고 잘 썩지 않는 생명력을 자랑하는 나무다. 통통한 나뭇가지에 맺힌 상고대를 보면 루돌프 사슴뿔이 떠오른다. 상고대 핀 오동통한 가지가 온기를 품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함백산에서 중함백 가는 길 들머리에 서 있는 주목. 김선식 기자

눈 덮인 등산길에 사람 발자국은 희미하고 짐승 발자국만 뚜렷했다. 상고대 맵시에 취했다가도 짐승 발자국을 보면 심장이 벌렁거렸다. 중함백에서 은대봉(해발 1442.3m)으로 가는 길가는 산죽이 무성하다. 사람 하나 간신히 걸을 만큼 길이 좁다. 은대봉은 ‘상고대 정원’이다. 상고대가 맺힌 나무들이 봉우리를 삥 둘러싸고 있다. 멀리 구름은 상고대 핀 가지 끄트머리를 가로지른다. 두문동재로 내려가는 길, 탁 트인 시야에 비단봉과 매봉산, 금대봉 산줄기가 들어온다. 그 병풍 같은 풍경을 등지고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두툼한 상고대 내려앉은 나뭇가지가 휘날린다.

지난 12월27일 은대봉에서 내려가는 길에 바라본 풍경. 바로 앞 봉우리가 금대봉이다. 김선식 기자

무사히 산행을 마쳤다. 두문동재 도착 시각 오후 12시35분. 새벽부터 꼬박 6시간40분 걸렸다. 눈 쌓인 도로엔 차가 보이지 않았다. 태백시 삼수동 방향 도로 갓길을 걸었다. 추전역 삼거리 시내버스 정류장까지 6㎞ 거리, 약 1시간30분 더 걸어야 한다. 손을 흔들어도 무심히 지나치는 차들이 야속했다. 갓길은 편했다. 더는 두려움도 추위도 느끼지 않았다. 고개(만항재)에서 산봉우리 3개(함백산, 중함백, 은대봉)를 넘고 또다시 고개(두문동재)를 넘어가면서 눈의 이미지들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새까만 산속에서 반짝이던 ‘은가루 불빛’과 파랗게 시린 하늘 아래 새하얀 상고대가 어른거렸다. 그것도 잠시, 새해에도 고개 너머 산 아니면 산 너머 고개일 것 같은 새파란 현실감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새벽 산속에서 그랬듯, 몇 마디 말을 소리 내어 되뇌었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더 잘 살고 싶다.’ 함백산 ‘겨울왕국’의 환상적인 풍경이 또다시 아른거렸다.

정선·태백(강원)/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함백산 눈꽃 여행 수첩

주의사항 태백산, 함백산, 은대봉, 두문동재 일대는 멧돼지가 널리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밤과 새벽 산행은 위험하다. 특히 혼자 하는 산행은 금물이다. 밝을 때, 등산객들이 많은 주말에, 산행 경험 많은 가이드가 동행하는 여행사와 함께하는 걸 권한다. 함백산 정상에서 1㎞ 떨어진 도로변에 주차하고 태백산 국립공원 문을 통과해 함백산 정상까지 산행하는 방법도 있다. 만항재에서 400~500m 함백산로를 타고 가다가 서학로 방향으로 우회전해 2㎞가량 더 가면 나오는 갈림길에 국립공원 출입문이 있다.

멧돼지 만났을 때 대처요령 멧돼지는 야행성이다. 밤과 새벽 산행에서 만날 확률이 더 높다. 발자국은 소 발굽처럼 2개로 찍히며 사람 주먹 크기다. ‘쿡쿠쿠쿠쿠’ 소리를 낸다. 소리는 크지 않다. 청각과 후각이 발달했다. 사람 냄새나 소리를 200~300m 거리에서도 감지하고 알아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땅 속에 있는 뿌리를 파먹다가 갑자기 사람과 마주치면 당황해서 덤벼들 가능성이 있다. 무작정 도망가거나 멧돼지를 흥분시켜선 안 된다. 가만히 서 있다가 나무나 바위 뒤로 숨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멧돼지를 만나면 조용히 접이식 우산을 펴는 것도 방법이다. 시력이 나쁜 멧돼지는 자기보다 큰 동물이나 장애물이 나타난 줄 알고 도망가곤 한다. 통념과 달리 빨강처럼 색깔 있는 옷이 멧돼지에게 혼란을 일으킨다. 검정 옷은 오히려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도움말: 김상구 태백시 문화관광해설사)

준비물 장갑, 귀마개, 목도리, 등산화, 아이젠, 스패츠, 등산스틱, 손전등, 이동식, 물 등.

숙소 만항재 쉼터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함백산 민박(정선군 고한읍 산214-18/033-591-5668)이 있다. 개별 화장실과 공용 주방이 있다.

교통편 시외버스가 정차하는 고한사북공용터미널에서 만항재까지 약 13㎞ 거리다. 시내버스나 택시로 이동할 수 있다.

김선식 기자

정선·태백(강원)/글·사진 김선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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