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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1.07 09:17 수정 : 2019.11.07 20:45

노동효의 지구 둘레길

라오스 현대사가 녹아있는 비엥싸이
여행자 유혹하는 ‘로드 페로몬’ 가득한 곳

잘 곳 못 찾아 불안할 때 도착한 야오족 마을

주술사 진두지휘 펼쳐지는 잔치

무작정 대문 두드렸지만 환대하는 몽족

그들 호의에 작은 사례로 인사하고 다시 도시로

소 키우는 아이들. 사진 노동효 제공

라오스가 타이·베트남과 더불어 한국인이 즐겨 찾는 여행지가 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배낭 여행자의 천국’이던 방비엥은 리조트, 호텔, 투어 프로그램이 들어찬 관광지가 되었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도시 루앙프라방은 탁발 행렬로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라오스 관광을 대표하는 두 도시 외에도 메콩에 흩뿌려진 4천개의 섬들로 유명한 시판돈, 크메르 유적을 만날 수 있는 참파삭 등. 라오스로 가는 여행자의 발길은 오늘도 끊이지 않는다.

나 역시 관광지와 명소도 다녔지만, 전형적인 여행 코스를 벗어나 낯선 도시나 지역으로 떠나곤 했다. 베트남과 접경한 비엥싸이 역시 여행자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외진 도시였다. 간혹 비엥싸이를 다녀간 여행자의 소식을 인터넷상에서 만날 수도 있는데, 방문 이유는 ‘숨겨진 도시’다.

1960년대 초 프랑스가 철수한 뒤 라오스는 공산주의자와 미국이 충돌하는 ‘비밀전쟁’의 전장이었다. 베트남은 ‘호치민 트레일’을 통해 라오스 공산당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했고, 미국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폭탄을 쏟아부었다. 폭격을 피해 라오스 공산당과 지지자들은 석회암 동굴 속에 도시를 만들었다. 400개 넘는 동굴이 내부 통로로 이어졌다. 2만3천명이 거주했고, 체류 기간은 10년. 미국이 철수하고 2년 뒤 라오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탄생했다.

수파누봉, 탄 카이손, 탄 캄타이. 임시정부 지도자의 이름을 딴 동굴에서 돌아와 호숫가에서 식사를 했다. ‘숨겨진 도시’ 아니더라도 유명 관광지가 되지 않은 게 의아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커피를 마시며 호수를 보는데 건너편 산들 사이 노란 실오라기가 보였다. 황톳길에서 ‘로드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이성을 유혹하는 호르몬처럼 ‘여행자를 유혹하는 길의 체취’를 일컫는 나의 용어. “우리 저 길로 들어가 볼까!” 방향을 가리키자 동행한 사진가 O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토바이 시동을 걸었다.

동굴들을 잇는 내부 통로. 사진 노동효 제공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어디서 자야 할지, 어디서 먹을지,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알 수 없음이 심장을 뛰게 했다. 확신하는 건 단 하나. 길이 있는 곳엔 사람이 산다. 언덕을 오르자 몽족 마을이 나타났다. 몽족 주민이 길 끝에 다른 마을이 있다고 했다. 얼마나 가야 길 끝에 닿을까? 해발 1천미터에 이르는 고개를 넘고, 또 넘었다. 도보여행은 아니지만, 루시드 폴의 ‘걸어가자’가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걸어가자 모두 버려도/나를 데리고 가자/후회 없이/다시 이렇게/나를 데리고 가자.’ 그리고 닿았다. 카무족 마을.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들 웅성거림에 어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막바지인지, 더 가야 하는지 알아내려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말을 쏟아내는 사람들 사이로 한 청년이 비집고 나오더니 물었다.

“멘냥?(무슨 일이요?)”

“라오스어를 하는군요. 여기가 이 길의 끝인가요?”

“10킬로미터 더 가야 끝이 있어요. 야오족이 살아요. 어디서 왔어요?”

“한국인입니다.”

“이방인이 이 마을에 온 건 처음인데요….”

대화를 듣던 주민들이 앞다퉈 청년에게 물었다. 무슨 내용을 주고받았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청년이 전하자 노인이 고개를 휘저으며 뭐라고 했는데 알아들을 수 없었다. 통역을 부탁했다.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처음은 아냐. 한 30년 전이었든가? 머리카락 노란 이방인이 찾아온 적이 있었어.”

O와 나는 고민에 빠졌다. 원주민의 거리 감각이 실제와 다를 때가 많다는 걸 우린 알고 있었다. 가보면 10킬로미터가 수십킬로미터로 늘기도 했고, 반으로 줄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여기서 멈추기엔 아직 해가 많이 남아있었다. 다시 길을 떠났다.

오지의 소수부족 마을. 사진 노동효 제공

가도 가도 마을이 나오지 않았다. 10킬로미터를 지난 지도 오래. 해지고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는 걸까. 루시드 폴의 노래가 환청처럼 다시 머릿속을 휘저었다. ‘세상이 어두워질 때/기억조차 없을 때/두려움에 떨릴 때/눈물이 날 부를 때/누구 하나 보이지 않을 때/내 심장 소리 하나 따라/걸어가자, 걸어가자.’

어둑해질 무렵 마을이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에 첫 집으로 들어섰는데 마당 안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사내 둘이 소뿔을 허공에 던지고, 한발로 뜀뛰기를 하고. 무슨 상황이지? 어리둥절해 있는데 다른 사내가 다가왔다. 라오스어로 “무슨 일이냐”고 했다. 말이 통하니 천만다행이었다.

“한국에서 온 여행자인데, 재워줄 수 있나요?”

“이런 길운이 있나! 주술사가 재앙은 밖으로 내보내고 길운은 불러들이는 주술을 집집마다 차례차례 해주는데 오늘은 우리 집이죠. 먼 나라에서 손님이 왔으니 더없이 좋은 징조군요. 잔치에 쓰려고 돼지도 잡았는데 여기 짐을 푸세요. 얘들아, 두 사람 잠자리를 준비하렴.” 집주인이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호의를 베풀던 몽족 남편. 사진 노동효 제공

잘 곳이 생긴 것만 해도 다행이고, 오지에선 먹을 것이 귀하기 때문에 쌀밥에 푸성귀 상차림만으로도 감지덕지한데, 돼지까지 잡았다니! 길운인 건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마련해준 방에 짐을 내려놓고 얼른 마당으로 나왔다. 주술사의 희한한 동작에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켰다. 근데 멀쩡하던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았다. 뷰파인더엔 어떤 상도 맺히지 않았다. 결국 본 장면을 말로 전할 수밖에 없는데….

주술사들은 주문을 외며 소뿔을 반으로 가른 토막을 던져서 떨어진 괘를 보고, 외발 뛰기와 두발 뛰기를 반복했다. 주술이라기엔 놀이 같고, 낯설지만 익숙한 광경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소뿔을 반으로 쪼개 만든 네 토막은 분명 윷이고, 뛰는 모양새는 분명 사방치기 동작이었다. 밤이 되자 주술사는 횃불을 들고 집 구석구석 어두운 곳을 찾아 불을 비췄다. 심지어 흙 마당에 박힌 돌까지 뒤집어 횃불을 들이대고 주문을 외웠다. 잡귀가 숨어있기라도 한 듯.

잔치가 시작되었다. 야오족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잡은 돼지로 찾아온 손님을 대접했다. 사람들은 술잔을 채워 연신 내게 권했다. 독주를 들이켠 후 코를 잔뜩 찡그리자 웃음을 터트렸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떠들고 웃었다. 언어도, 생김새도 달랐지만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반갑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으니까.

다음 날 아침, 지난밤 곁에서 술잔을 건네던 사내가 찾아왔다.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가 있는데 용도를 모른다며 우리가 와서 한번 봐 달라는 것이었다. 사내의 집으로 갔다. 보자기 속에서 꺼내놓은 가보는 책이었다. 낱장을 넘겼다. 천자문 수준으론 읽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가만 보니 반복되는 한자가 있었다. “이건 당신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부터 세대를 거듭하며 자손의 이름이 무엇인지 차례차례 새겨놓은 겁니다. 즉 당신 집안의 역사지요.” 가보의 용도를 알게 되어 기뻐하는 사내를 뒤로하고 집을 나오다가 돌아보았다. 사내는 낱장을 한장, 한장 들추며 골똘히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무언가가 사내를 지나가고 있는 듯했다.

진창길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오토바이. 사진 노동효 제공

야오족과 카무족 마을에서 며칠을 보내고 산에서 내려오던 날, 비가 내리고 황톳길이 온통 진창으로 변했다. 눈길보다 미끄러운 진흙탕에 오토바이가 미끄러졌다. 고개를 들자 댓잎 사이로 먹구름이 보였다. 날은 어두워지고 빗방울은 점점 굵어졌다. 오토바이를 타고 산에서 내려가는 건 무리였다. 대숲에 오토바이를 숨기고 잘 곳을 찾아야 했다.

속옷까지 젖은 채 몽족 마을에 닿았다. 무작정 불 켜진 집 대문을 두드렸다. 젊은 부부와 세 아이가 사는 집이었다. 난처한 상황을 손짓 발짓 섞어 설명하는 동안 남편이 연신 웃음을 지었다. 불청객이 나타났는데 성가시긴커녕 반갑기만 한 모양이었다. 남편이 자신의 옷을 주었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불가에서 몸을 녹였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부인이 배가 고프냐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이 화덕에 밥을 안쳤고 남편이 닭을 잡아 요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술이 고팠다. 술이 있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옆집까지 가서 술을 구해왔다. 그렇게 아무런 연고도 없는, 허름한 헛간 같은, 그러나 너무나 아늑한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비는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그쳤다.

몽족 부부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 만난 동네 아이들. 사진 노동효 제공

여염집에 잠자리를 청할 때 사례를 하겠다고 얘기하진 않았다. 대가를 바라지 않은 채 베푸는 호의를 고스란히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신 떠나며 할머니나 부인에게 약간의 돈을 건넸다. 길손에게 잠자리와 먹을 걸 베푸는 건 너무나 당연해서 받을 수 없다고 손사래 쳤지만 “저희 대신 아이들에게 맛있는 걸 사 주세요”라고 손짓 발짓으로 말하면 웃으며 받아주었다.

이제 도시로 돌아갈 시간, 좌우로 나누고 진보와 보수로 나누고 더 쪼개고 쪼개서 너와 내 생각이 다르다며 싸우는 세계로. 문득 그 모든 다툼을 통해 닿으려는 지점이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반가운 이 세계’가 아니던가, 쪼개고 쪼개서 다투다가 깜박 목적지를 잊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산에서 내려오던 길. 오토바이 엔진음 위로 루시드 폴의 노래가 내려앉았다.

‘걸어가자 처음 약속한/나를 데리고 가자/서두르지 말고 이렇게/나를 데리고 가자.’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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