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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0.03.03 19:31 수정 : 2010.03.07 15:35

남친 말고 딴 사람한테 빠져버렸는데…양다리 걸쳐도 될까요? 일러스트레이션 양시호

[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마음 편할 방법은 나한테 묻지마

Q 저에게 정말 잘하는 3년 된 남친이 있어요. 결혼할 예정이구요.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어떤 모임에서 그분을 처음 만났는데 서로 첫눈에 반했어요. 그래서 남친이 있다고 도저히 말을 못했어요. 그분도 30년 살며 진짜 상대를 만났다며 사귀자고 했어요. 몇 번 더 만났고 잊어보려 했지만 하루 종일 그분 생각만 나고 꿈에도 나오고 너무 설레요. 전화 오면 그분 전화일까 기대하고 남친이면 실망하고. 하지만 들킬까봐 불안해 죽을 거 같아요. 남친을 사랑하고 정도 많이 들었고 첫 남자고 양가에 인사도 했어요. 섣불리 이렇게 괜찮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가 그분과 잘 안되면 결혼이고 뭐고 제 인생이 꼬일 것만 같아요. 하지만 하루 종일 그분만 생각나고 설렙니다. 정말 괴로워요. 몸무게가 3㎏이나 빠졌어요. 작정하고 양다리 걸치는 건 안 될까요? 너무 이기적인가요? 저 좀 살려주세요.

A 살려달라고. 절절한 구호 요청이로다. 그렇다. 어쨌거나 살고 봐야 한다. 그런데 왜 어찌할지 답을 못 찾느냐. 답이 없기 때문이냐. 아니다. 질문이 껍데기라 그렇다. 무슨 소리냐. 보자.

1. 90년대 스위스 베른대학의 베데킨트라는 자가 재밌는 실험을 했다. 남자 대학생들에게 이틀 동안 같은 티셔츠를 입게 해 채취를 배게 한 뒤, 그 티셔츠를 여학생들에게 건네 오로지 그 냄새만으로 상대에 대한 호감도 조사를 했는데. 어떤 결과가 나왔느냐. 수십 명의 조사 대상 모두 서로의 특정 유전자 정보가 차이가 나면 날수록 더 큰 성적 호감을 상대로부터 느꼈다는 거. 외모는 물론 상대에 대한 그 어떤 사회 경제적 정보도 없는 상황에 티셔츠 냄새 하나 맡고서 말이다. 그건 서로 차이 나는 유전자 결합을 통해 보다 튼튼한 면역계를 구성하려는 자연의 섭리라는 해석을 비롯해 여러 주장과 반박들이 있다만 뭐 그야 선수들이 알아서 정리할 일이고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이거다.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건 이성과 합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 그건 불가항력의 영역이라는 거. 그냥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형이니 뭐니 하는 건 많은 경우 착각에 불과하다. 이러저러한 조건들을 조합해 이상형을 기획해내곤 하는데 실제 현실에서 불현듯 누군가에게 매혹당하고 마는 건 그런 추론의 합성물과는 무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제 그런 상호작용을 지배하는 건 머리가 아니라, 몸이기 때문이다. 나를 구성하는 총체적인 몸이, 근본적 레벨에서 그냥 반응하는 거다. 해서 내가 왜 상대에게 반했는지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부질없다. 그건 그저 천재지변처럼 쾅하고 들이닥친 돌발사건인 거다. 그리고 그래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반했다는 사실 자체는, 나이나 신분은 물론 그 어떠한 사회적 조건과도 무관하게,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2. 여기까진 위로다. 당신이 그에게 반했단 자체는 죄일 수 없단 소리다. 그런데 그렇게 매력적인 상대임에도 당신은 살이 빠지도록 주저한다. 왜. 이유, 많다. 당신은 자신이 3년이나 된 혼약 연인을 한순간에 배신하는 인간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다. 비난도 두렵다. 물론 남친과 장기 공유한 추억, 그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 그의 사랑에 대한 감사, 첫 상대라는 상징, 언약에 대한 의리, 집안에 대한 예의, 모두 복합 작용한다.

김어준 딴지 종신총수
그러나 이미 전화조차 반갑지 않은 남친을, 여전히 사랑한다며, 떠나지 못하는 보다 내밀한 이유는 따로 있다. 당신도 안다. 섣불리 택했다가 본전까지 까먹을까봐. 가슴 뛰게 하나 아직은 검증되지 않은 상대에게 올인 했다, 이미 안정적으로 확보된 양질의 파트너까지 상실할지 모른다는 공포. 나아가 새 상대가 기대치에 미달하는 자로 판명될지도 모르는 리스크까지.

그 맥락에서 현재 당신 남친은 심리적 보장자산이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당신 자존심의 마지노를 지켜내고 미래의 예측가능성을 담보해내기 위한 안전장치. 그게 지금 현재 당신 남친의 진짜 배역이다. 당신이 여전히 그와의 추억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싶어 하고 그의 사랑에 감사하며 그로 인한 안정감에 기꺼워한다고 할 수는 있겠다. 허나 지금의 당신이, 그런 부연설명 없이 예전처럼 남친을 사랑한다고만 말한다면, 그건 기만이다. 반갑지 않은 사랑이, 어디 사랑이더냐.

3. 그러니까 당신이 진짜로 묻고 있는 알맹이는 두 가지다. 첫째. 새 상대의 품질이 확인될 때까지 기존 상대를 보험 삼는 건 안 되나요. 답. 그거, 안 될 거 없다. 그런 이들 부지기수다. 우선 살고 보겠다는 무수한 이들의 생존법이다. 양다리는 그 기법 중 하나일 뿐. 그럼 두 번째 알맹이는 뭐냐. 그때까지 내가 죄의식 없이 마음 편할 방법은 없을까요. 그러자면 해결할 문제는 이거다. 그런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이건 절대 남이 답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당신이 정말로 몰라서,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은 딱 하나인 거다. 나는 어떤 사람이냐. 스스로 용인 가능한 자신의 바닥이 어디까지인지 묻는, 그 본원적 질문을 정면으로 대면하기만 한다면, 당신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김어준 딴지 종신총수 /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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