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2) 볼리비아 숲속에서 만난 ‘무지개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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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모임에서 식사는 가장 성스러운 의식 중 하나다.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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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은 ‘레인보 패밀리 오브 리빙 라이트’. 줄여서 레인보 패밀리, 무지개 가족이라 부른다. 지구상 어느 대륙에나 존재하지만, 이끄는 사람도 따로 없다. 그럼에도 1972년부터 45년째 무지개 모임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무정부주의 성향 유랑자들의 집회로 워낙 느슨한 조직이다 보니 관심 주제도 다양하다. 환경주의, 페미니즘, 비폭력평등주의, 평화행동주의 등. 모든 건 ‘사랑과 평화’로 귀결된다. 그들은 말한다, 무지개 모임은 1960년대 히피가 뿌린 씨앗에 물을 주고 그 씨앗을 퍼뜨리는 것이라고.
무지개 모임에 참여하는 순간부터, 누구나 무지개 가족이 된다. 서로가 서로를 ‘자매’나 ‘형제’라고 부른다.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옷과 담요와 체온을 나누고 돈거래는 하지 않는다. 모임이 열리는 나라나 장소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가족 중 누구라도 ‘숲이나 물가’에 야영 장소를 고르고, 1년 중 몇 월이라도 ‘초승달부터 그믐달’까지 기간을 정해 공지하면 된다. 한 달 중 단 며칠이라도 좋다. 자연을 찬양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고,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걸 배우는 사이 저도 모르게 씨앗을 나눠 받는다. 씨앗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나라나 지역으로 가져가 심는다.
여기, <한겨레> 지면을 통해 무지개 씨앗을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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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들의 대표적인 이동수단은 히치하이킹. 티켓은 엄지손가락!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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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르치르 치르치르. 안데스에 깃든 새의 지저귐 소리에 잠이 깼다. 간만에 야영을 한 터라 몸이 뻐근하다. 텐트 바깥으로 나와 기지개를 켠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허파꽈리가 초록으로 물든다. 어젯밤 세수도 못 하고 잤는데, 어디서 물을 구하지? 덤불 사이를 지나 중앙광장(모닥불을 피우는 곳)으로 갔다. 광장을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는 안내판. 화장실, 공동부엌, 명상터, 강. 강으로 가면 되겠구나. 수건만 달랑 챙겨 화살표를 따라갔다. 오솔길을 5분쯤 걷자 물소리가 들린다. 소리 크기로 짐작건대 낮은 폭포가 있나 보다. ‘리오’라고 써 붙였지만 깊은 산중에 강이 있을 린 없고, 아마도 개울이겠지. 나뭇잎 사이로 자매, 형제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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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 산맥 해발 2천미터. 텐트와 침낭은 무지개 모임에 참여하기 위한 필수품이다.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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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가로 내려가니 몇몇은 세수를 하고 몇몇은 물장구를 치는데, 나체다. 이게 뭐지? 무엇보다 나를 당황케 한 것은 러시아 친구 사샤. 녀석은 알몸 상태로 이리저리 팔다리를 구부리며 요가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다가 헛둘, 헛둘, 팔굽혀펴기는 또 뭔가? 아주 열심이구먼, 입영통지서가 나오자 도망 온 주제에. 한여름이면 윗도리만 걸친 채 지내는 탓에 집에선 ‘곰돌이 푸’라고 불리는 나지만 누드비치도 아닌 숲에서 사람들이 나체로 돌아다니는 모습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풍덩.
눈 뜨면 먹거리·재능을 나누고
해 저물면 모닥불 앞 축제
노래하고 연주하고 춤추면
해방된 영혼의 우주가 열린다
히피들 중 자연주의자가 많은 건 사실이다. 그들은 나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상태로 여긴다. 옷을 입지 않아도 호랑이는, 사슴은, 돌고래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추위 때문에 옷 입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이미 아름다운 공작에게 알록달록 천을 씌워놓은 거랑 뭐가 달라’ 하는 거다. 물가에서 놀다 보니 곧 배가 출출해졌다. 설마 식재료가 다 떨어진 건 아니겠지?
공동부엌으로 갔다. 먹거리는 공동부엌에 모아놓고 다 같이 나눠 먹는다. 프랑스 형제들이 둘러앉아 야채를 썰고, 밀가루를 치대는 중. 그럼 오늘은 프랑스 요리? 알코올 금지(이 부분이 나로선 가장 견디기 힘든 부분이었다)라 포도주 한 병 없을 텐데, 아쉽겠구나. 냉장고, 싱크대, 가스레인지는 없다. 뚝딱뚝딱 나무로 만든 조리대와 진흙으로 감싼 화덕이 전부. 화덕 위 냄비 안에선 보글보글. 쌀, 당근, 감자, 완두콩 각종 야채가 다 들어 있다. 요리하며 먹으라고 바나나를 건네니 형제들이 갸웃거리다가 바나나도 냄비 안에 썰어 넣는다. 뭐야, 야채든 과일이든 닥치는 대로 다 넣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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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모임에서 식사는 가장 성스러운 의식 중 하나다.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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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12%%] 화덕 옆자리는 호세 할아버지와 브라질에서 온 마르코가 차지했다. 호세 할아버지야 불 조절을 하고 있다지만 마르코 저 녀석은 뭔가? 말 많고 행동은 굼뜬 인간형. 근데 어쩐 일인지 입 다물고 꽤나 진지한 자세로 ‘바가바드기타’(힌두교 경전의 하나) 삼매경이다. 히피에도 여러 부류가 있는데 마르코는 ‘하레 크리슈나’ 쪽이다. 1960년대 히피들에게 영향을 준 힌두교 종파로, 비틀스 멤버 조지 해리슨이 대표적 인물. 그가 작사·작곡한 ‘마이 스위트 로드’는 크리슈나를 찬양한 노래. 이들의 특징은 힌두 경전을 탐독하고 산스크리트어로 쓴 ‘옴’을 몸에 새기거나 부적으로 갖고 다닌다. 젊은 시절 히피랑 어울렸다는 스티브 잡스도 크리슈나계 히피와 관계가 있다지, ‘애플’이란 회사명도 사과를 따던 히피 공동체에서의 경험 때문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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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레 크리슈나’류 히피의 필수품은 힌두 경전이다.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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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왔는지 사샤가 불가에 대충 자리를 잡고 피리를 불기 시작한다. 콜롬비아에서 온 오스카가 북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춘다. 무지개 가족은 대부분 악기 하나 정도는 갖고 다닌다. 특히 ‘거리의 악사’류 히피에게 악기란 밥벌이에 반드시 필요한 연장이다. 무지개 모임에서 만나 즉석밴드를 만들고 함께 유랑하기도 한다. 마테를 돌려 마시며 피리와 북이 어우러진 연주를 감상하는데 슬며시 탄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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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악사’류 히피의 필수품은 당연히, 악기다.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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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모임에선 모든 음식을 공평하게 나눈다. 정말 오이 한 조각, 빵 한 조각까지!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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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다 된 거 같은데.”
“어디 보자, 그러네. 자매형제들을 부르자 하나, 둘, 셋! 꼬메!”
마이크나 스피커 같은 건 없다. 필요할 땐 함성을 지르고,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무는 사람부터 차례차례, 메아리처럼 소리가 퍼진다. ‘먹자!’ 소리가 가장 먼 곳까지 퍼져나가는 동안 우리는 다 함께 둘러앉을 장소로 먹거리를 옮겼다. 온 가족이 다 모이고, 우리는 손과 손을 잡고 둘러앉아 ‘옴’을 읊조린다. 그리고 차례차례 건네받은 ‘성스러운 주걱’에 입을 맞춘 뒤 각자 그릇에 밥을 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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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모임에선 모든 음식을 공평하게 나눈다. 정말 오이 한 조각, 빵 한 조각까지!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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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가족에게서 배울 수 있는 기술 중 하나, 수공예품 만들기.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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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가족에게 숲은 학교이기도 하다. 각자가 경험한 문화가 다르고, 그래서 매일 번갈아 가며 교사가 된다. 하루는 아르헨티나에서 온 형제가 탱고 수업을, 하루는 에콰도르에서 온 형제가 드럼 수업을, 하루는 인도를 다녀온 자매가 요가 수업을. 그뿐 아니라 숲을 벗어났을 때 생존할 방법, 가령 마크라메(매듭 공예)를 만들어 팔며 여행하는 ‘길거리 수공예품 상인’류 히피에게 팔찌와 목걸이를 만드는 법을 배우기도 하고 저글링, 곤봉, 데블 스틱을 따라하는 식이었다. 무지개 가족의 존재를 내게 알려준, 우루과이 대학을 졸업하고 길 떠난 지 6개월 되었다는 가비가 왜 “학교보다 무지개 모임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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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가족에게서 배울 수 있는 기술 중 하나, 수공예품 만들기.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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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11%%] 매일매일 해가 저물면 축제가 시작된다. 누가 부르지 않아도 우리는 모닥불 지펴놓은 광장에 모여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고, 춤을 췄다. 뭐든 자신이 갖고 온 악기가 있다면 연주에 동참한다. 대부분의 노래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노래는 금세 후렴구를 따라 부를 수 있었다. 헤야 헤야 헤야 헤야 헤야 훔, 헤야 헤야 헤야 헤야 훔. 노래가 절정에 달하면 자매형제들은 담배와는 다른 풀을 돌려 피우며 음악이라는 우주를 유영했다. 숲은 바빌론(대도시 문화를 그렇게 부른다)과 전혀 다른 세계였다. 그믐달이 다 지고 나면 우린 ‘집 - 무지개 모임’을 떠나 흩어질 것이다. 바빌론의 속도에 맞춰 사는 삶을 거부하는 이들은 명상센터로, 거리의 악사로, 길거리 수공예품 상인으로, 또 어떤 이는 무지개를 타는 자(무지개 모임에서 모임으로 이동하는 것)로 남을 것이다. 모닥불에서 눈을 거두고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남미의 어두운 등뼈 위로 별똥별 하나 김중식의 시를 그으며 날아간다.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노동효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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