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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9.07 19:30 수정 : 2016.09.07 19:47

[매거진 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은 ‘브라질 해적’ 가브리엘라

페루에서 불법체류 중이던 브라질 친구, 가브리엘라. 노동효 제공

“난 브라질 출신의 해적이야.” 가브리엘라는 자신을 ‘피라테’라고 소개했어. 그치만 곧이곧대로 믿기엔 그녀는 흉터 한 점 없이 고왔어. 문신이 있긴 했지만 뒷골목 형님들의 알록달록 동물 그림과는 다른 화풍, 정교한 도형이 뒷목을 중심으로 양어깨를 따라 대칭을 이루며 그려져 있었어. 아프리카 소말리아 앞바다도 아니고, 21세기 카리브해에 영화에나 등장하던 해적이 있다는 건, 너무 황당하잖아. 더구나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고 다니는 해적이라니!

“바다의 도둑 말이지?” 내가 되물었어. 그녀는 사연이 길다고 했지. 아무리 길어도 듣고 싶었어. 당신이라도 그랬을 거야. 그녀의 눈을 보면 겪은 사연을 매일 하나씩 천일 동안 들으면 좋겠다, 싶었을걸.

“나 여권이 없어. 페루 국경을 그냥 넘은 거야. 경찰이 알면 당장 날 감방에 가둘걸.”

“아, 네가 말하고 싶었던 단어는 해적이 아니라, 불법이란 거지?”

“어이쿠, 그렇구나. 하하하.”

가비는 포르투갈어와 에스파뇰을 섞은 ‘포르투뇰’로 말하고, 난 스페인어와 잉글리시가 섞인 ‘스펭글리시’를 말하던 중 그녀가 ‘불법’에 해당하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해 벌어진 해프닝이었지. 그녀의 소꿉친구 카일라가 아우키하우스에서 묵고 있었는데, 그 무렵 숙소 침대가 모두 차버린 탓에 카일라의 방, 즉 나도 사용하던 4인실의 바닥에 가비는 매트리스를 깔고 4솔(1400원)을 내고 지내게 되었어. 잠들기 전 가비가 혼잣말처럼 말했어.

“난 마추픽추에 가고 싶어서 쿠스코에 온 거야.”

“언제 갈 계획인데?”

“그건 모르겠어. 돈이 거의 떨어졌거든. 일자리를 알아볼까봐. 돈 벌면 꼭 갈 거야.”

아우키하우스에서 늘 듣던 소리였어. 다른 관광객과 마찬가지로 다들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쿠스코에 왔다지. 그러나 마추픽추를 다녀온 이는 없었어. 왕복 300달러가 드는 기차는 엄두도 못 내고, 마추픽추에서 가장 가까운 종점까지 가는 버스에서 내려 걷더라도 교통비와 아과스칼리엔테스에서 숙식비, 무엇보다 마추픽추 입장료 50달러. 대충 잡아 10만원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은 하루 3달러도 안 되는 돈을 내는 친구들에겐 한 달 숙박비와 맞먹었지. “돈 모으면 갈 거야.” 다들 다짐이라도 하듯 그 말을 하곤 했어. 그러다 서빙을 하고, 거리 연주를 하며 푼돈을 저금해 마추픽추에 갈 돈이 모이면 숙소를 떠났어. 남은 이들은 떠나는 이의 복을 빌었지. “드디어 너도 마추픽추에 가는구나. 널 위해 기도할게.” 떠난 자는 돌아오지 않았어. 꿈꾸던 것을 봤으니 다른 꿈을 찾아 떠난 거지. 매일 밤 우리는 꿈을 꿨어. 안개에 휩싸인 마추픽추가 햇살을 받아 자신의 찬란한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을.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듯
우르르 인증샷 찍고 가는 이들과
가고싶은 마음 하나만으로
걷고 또 걸어 당도한 그녀가
과연 같은 풍경을 보았을까

작은 마추픽추라고 불리는 피삭의 유적지. 노동효 제공
I WILL BE BACK.(돌아올게) 아우키하우스의 벽에 이렇게 써놓고 난 마추픽추를 향해 길을 떠났어. 피삭, 우루밤바, 오얀타이탐보, 산타마리아. 마추픽추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계곡 200킬로미터 위의 마을에서 묵은 뒤 차가 다니는 종점, 수력발전소로 가는 버스에 올랐어. 비포장에 낭떠러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는 산길. ‘죽음의 도로’와 맞먹었지만 난 좋았어. 거대한 돌산 가운데서 쏟아지는 폭포와 협곡 사이로 흐르는 우루밤바 강이 펼쳐놓는 황홀한 절경들.

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길은 비포장에 낭떠러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는 산길이다. 노동효 제공
마추픽추로 가는 우회로, 수력발전소에서 내려 철길 따라 걷기 시작했어. 기차를 탔더라면 보지 못했을 풍경과 물소리와 새들의 울음소리. 다 좋았는데 협곡이라 해가 너무 일찍 졌어. 앞이 보이지 않았어. 손전등을 켜고 길을 걸었어.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어. 반딧불이었어.

일명 마추픽추 마을, 아과스칼리엔테스는 페루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곳 중 하나. 철길 외 다른 길이 없어 외딴섬과 다를 바 없지만 유명세로 인해 불빛이 휘황했어. 중심가의 호스텔로 들어갔어. 온 가족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지. “숙박비가 얼마죠?” “40솔!” 대답과 동시에 온 가족이 비명을 질렀어. “골인!!!” 페루가 국제축구대회에서 골을 넣는 순간이었어. 재빨리 나는 되물었어. “20솔(에 해 주세요)?” 어떤 대답이 돌아왔을 것 같아, 선제골에 정신없이 부둥켜안고 소리치는 사람들로부터.

잉카의 공중도시 마추픽추가 안개와 구름을 벗고 위용을 드러내는 모습. 노동효 제공
새벽에 눈을 떴어. 안개와 실비. 그러나 해 뜨면 맑아질 것 같았지. 마추픽추를 만날 최적의 시간, 나서자! 마침내 나는 안개와 구름에 뒤덮인 마추픽추가 베일을 벗고 위용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았어. 아, 그건 신비 그 자체였어. 안개가 하얀 용처럼 초록빛 계곡 아래서 꿈틀꿈틀 올라와 마추픽추를 타고 넘어가길 수차례, 해가 드는 동시에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었어. 곧 사람들로 가득 찼지. 뷰 포인트로 알려진 지점 앞에서 사람들은 차례차례 줄서고 차례차례 갖은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어. 내가 앉았던 자리도 곧 사람들로 가득 찼지.

나만의 뷰 포인트를 찾기로 했어. 근데 돌아보니 사위가 조용한 거야. 당일치기 기차를 타고 온 관광객은 인증샷 찍기 무섭게 가이드 설명을 듣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산을 내려가고 있었어. 다시 고요가 찾아왔지. 그런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고 정오 무렵 한 차례 더 단체관광객이 올라와 야단법석을 떤 후 “볼 거 다 봤으니 밥 먹으러 갑시다!”며 사라지자 마추픽추는 한적한 유적지로 변했지. 한 지점을 뷰 포인트로 점찍은 후 잉카 다리를 다녀오기로 했어. 낭떠러지 옆으로 난 길 지나 다다른 끝엔 외적이 침입했을 때를 대비한 도주로가 있었어. 나무다리를 밀어버리면 누구도 뒤따를 수 없는 절벽의 길.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만들어진 도주로와 낭떠러지에 세워져 있는 잉카 다리. 노동효 제공
되돌아와 점찍어둔 뷰 포인트로 갔는데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 그래도 저쯤에서 한 장 찍어둬야지. 자리를 뺏은 이의 등 뒤에 서서 사진을 찍는데, 엇? 뒷목에 새겨져 있는 건 분명 가비의 문신이었어.

그렇게 우린 다시 만났어. “지금 아니면 영영 못 볼 것 같았어. 내가 가진 전부를 털어 온 거야.” 종점에서 걸어왔을 뿐 아니라, 내가 10달러를 내고 셔틀버스 타고 온 길도 걸어왔다고 했어. 새벽에 올라와 여태껏 남은 입장객이 나 말고 또 있었구나. “드디어 마추픽추에 왔어!”라고 말하는 가비의 눈은 감격으로 젖어 있었지. 해가 기우는 동안 우리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어. 오후에도 단체관광객의 파도가 밀려왔다가 쓸려가곤 했지. 한 차례의 고요가 찾아왔을 때 가비가 말했어.

“아침부터 사람들이 왔다가 사라지는 걸 지켜봤어. 슈퍼마켓 같았어. 물건 사듯 마추픽추를 사고 소비하고 내려가. 난 저들처럼 쉽게 내려갈 수 없었어. 이 풍경을 보기 위해 내가 가진 전부를 걸었으니까. 그래서 여기 앉았다가 알게 되었어. 이 여행이 홀로 떠난 첫 여행이고 첫 외국이야. 늘 부모님이 곁에 있었지. 그랬다면 지금도 기차를 타고, 저 아래 호텔에서 묵고 있겠지. 그치만 물질적 여유보다 지금의 자유가 더 좋아. 나 계속 여행할래. 브라질로 돌아가 제대로 출입국 도장을 받고 나와 계속 여행할래.”

마추픽추 마을로 불리기도 하는 아과스칼리엔테스의 골목길. 노동효 제공
가파른 계단길을 내려왔어. 내리막이라 대수롭잖게 여겼는데 중턱부턴 무릎이 아팠어. 이런 길을 가비는 새벽에 올라왔구나. 마을에 닿자 가게마다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어. 그녀는 한 식당 앞에 걸어놓은 메뉴에 잠깐 눈을 뒀다가 아쉬움을 삼키며 발걸음을 옮겼어. 난 그녀의 눈이 피자에서 머무는 걸 보았지.

“가비야, 피자 먹고 가지 않을래?”

“난 숙박비랑 내일 돌아갈 차비밖에 남지 않았어.”

“오늘은 우리에게 특별한 날이잖아. 혼자 보단 같이 축하하는 게 좋겠지. 내가 저녁을 사도 될까?”

촛불이 켜진 식탁에 앉아 피자를 주문했어. 시원한 맥주도. 피자가 나오고 우린 잔을 부딪쳤어. “난 해냈어!” 가비가 그 말을 하며 짓던 웃음을, 가진 전부를 걸어서 성취한 이가 짓는 감격의 표정을 당신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그래, 같은 마추픽추라도 다 같은 마추픽추가 아니었어.

노동효/여행작가

아과스칼리엔테스에서 수력발전소로 이어지는 철길에서, 가비. 노동효 제공

수력발전소에서 아구아스 칼리엔테로 이어지는 마추픽추행 샛길. 노동효 제공

마추픽추 마을로 불리기도 하는 아구아스 칼리엔테.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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