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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04 19:39 수정 : 2017.01.04 20:21

[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숨막히는 문명에서 벗어나 숨쉴 수 있는 곳 ‘카보폴로니오’

우루과이 카보폴로니오 바닷가.
그곳으로 가는 길은 없어. 모래사막을 넘어야 하니까. 큰 바퀴 트럭에 올라 뒤뚱뒤뚱 30분 동안 모래언덕을 달리면 그 마을에 닿을 수 있대.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어촌인데,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대. 이름난 명소도 없다지. 19세기 말에 세워진 등대 하나. 바람 부는 방향 따라 움직이는 모래언덕. 해변 바위에 누워 낮잠을 자다 뒤척이는 바다사자들, 지구 남반구가 더워지면 남극해로 돌아가던 고래 가족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야.

바닷속 암초와 모래언덕 때문에 오랫동안 그곳엔 아무도 살지 않았대. 18세기 초 조지프 폴로니호가 암초에 걸려 난파를 하고, 등대가 세워지면서 배의 접근이 가능해졌지. 바닥을 파면 지하수가 나오는 땅이라 어부들이 우물을 파고 조업철에 사용할 임시거처를 마련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어. 우루과이 동쪽으로 가는 10번 고속도로에서 7킬로미터 떨어진 그곳은 사막과 바다로 둘러싸여 섬이나 다를 바 없는, 곶. 사람들은 외부세계로부터 고립된 이 마을을 ‘카보폴로니오’라고 부르지.

카보폴로니오 바닷가 바위 위에서 낮잠을 자는 바다사자들.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전신주나 가로등이 있을 리 없고, 차가 다니지 않으니 차도나 신호등이 있을 리도 없어. 밤이 되면 양초를 켜고, 티브이나 인터넷으로 보는 세상 소식이여 안녕! 사람이 잠들고 마을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면, 별이 둥실둥실 수평선 위로 떠올라 파도 소리에 맞춰 반짝인다지.

사람 살기에도 힘든 장소를 굳이 찾아갈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런 곳으로 모여드는 부류가 있지. 히피들 말이야. 기계문명에 환멸을 느낀 히피들이 망명을 하듯 카보폴로니오로 모여들었어. 어부들과 어울리며 하나둘 정착하기 시작했지. 그저 모래바람을 막아낼 오두막 한 채로 족했으니까. 관공서나 경찰서도 없었어. 바다사자뿐 아니라, 히피들에게도 천적(?)이 없는 낙원이었지. 사구는 방풍림마냥 세상의 접근을 막아주었어.

모래와 수풀로 뒤덮인 언덕 뒤
황량한 해안가 작은 마을
전기도 수도도 없는 이곳은
“영혼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곳”

카보폴로니오가 여행자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야. 2009년엔 우루과이 정부가 카보폴로니오 해안 일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지. 국유지에 불법가옥을 짓고 사는 주민을 이주시키진 않았대. 대신 새 집을 짓는 건 금했지. 마을에 상주하는 주민은 백명 남짓. 여름철엔 소문을 듣고 관광객도 제법 모여들어. 사파리 트럭을 타고 들어와 한나절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지. 물론 원한다면 불편하더라도 묵을 수는 있어. 여인숙도 몇 채 있으니까. 도시생활에 환멸을 느낀 이들은 마을에서 며칠씩 묵기도 하고, 반복해서 찾기도 해. 내 친구, 치아고도 그랬지.

-로, 카보폴로니오에 가봤니?

-들은 적은 있지만 가보진 않았어. 가는 길이 꽤 번거롭다던데?

-내 차로 같이 가면 돼. 얼마 전에 다녀왔는데, 다시 가고 싶어졌어.

치아고는 여행사 사장으로 그 무렵 비수기라 가게 문을 닫고 쉬고 있었어. 그의 차를 타고 몬테비데오에서 동쪽으로 250킬로미터 달린 후, 고속도로를 벗어나 10분쯤 지났을까? 아스팔트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공원관리소가 있었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사파리 트럭에 올라탔어. 모래와 수풀로 뒤덮인 언덕을 넘자 황량한 해안이 나왔어. 딱딱한 백사장을 밟고 사파리 트럭은 거침없이 달렸어.

이 마을에 들어오려면 타야 하는 사파리 트럭.
비수기라선지 마을은 조용했어. 다행히 치아고가 묵었다는 호스텔이 문을 열어두고 있었지. 당분간 그 집에서 묵기로 하고 짐을 풀었어. 삐걱대는 목조건물은 허술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다락방의 매트리스에 누운 채 고개만 살짝 돌리면 창문 너머 쏟아지는 별을 볼 수 있었지. 여행작가 켈리 웨스토프가 “카보폴로니오에 있는 것은 머나먼 은하수 속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던 말 그대로였어. 마치 세계의 끝에 누워 있는 느낌이었지.

언젠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제작한 세계지도를 본 적이 있어. 우리가 평소 보던 세계지도의 남북을 뒤바꿔 놓은 지도. 그러자 오스트레일리아가 전혀 다르게 보였어. 방향이 바뀌자 위상도 다르게 다가왔지.

가령 우리는 주로 중국, 한국, 일본을 한가운데 놓은 세계지도를 봐. 오래전 중국을 방문했던 선교사들이 중국 황제가 불쾌해할까 봐 ‘유럽 중심의 세계지도’를 ‘중국 중심의 세계지도’로 급히 그려서 선물한 이후부터라고 하더군. 흔히 유럽인은 한국을 극동에 위치한다고 하는데 어릴 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 나중에 유럽인이 사용하는 세계지도를 보니 한국은 정말 ‘동쪽 끝’에 위치해 있더군. 근데 동그란 구에 극동이란 게 어디 있어? 우주는 동서남북은커녕 아래위도 없는걸.

나는 별을 바라보다가 내 머릿속의 지구본을 끄집어냈어. 머릿속 지구는 어떤 방향으로든 내 마음대로 돌려볼 수 있었지.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딱! 카보폴로니오가 세계의 끝이 되는 지점에서 멈추었어. 그때 난 알게 되었지. 아메리카의 남쪽 끝 푼타아레나스나 우수아이아뿐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바닷가가 세계의 끝이란 것을.

햇볕 좋은 낮엔 뒷마당에서 매트리스를 말리며 포도주를 마시거나, 바람을 이용한 전기를 저장하기 위해 설치한 풍력기를 바라보곤 했어. 그러다 심심해지면 하릴없이 길고 긴 해안선을 무작정 걸었지. 카보폴로니오 국립공원. 그러나 이과수 같은 장관이나 마추픽추 같은 명소는 없었어.

카보폴로니오의 해안 풍경.
우루과이뿐 아니라 나라에서 평범한 바다나 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걸 보곤 했어. 국립공원으로 지정한 목적이 ‘관광지로 만들어 관광수입을 올리겠다’는 건 아니었을 거야. ‘현재의 인류뿐 아니라 미래의 인류도 누려야 할 자산이기에 최대한 보전하겠다’는 의도였겠지. 물론 국립공원으로 지정을 하면,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도록 노력을 다하게 되고, 천연자연환경이 주는 매력으로 인해 관광객도 모여들어. 근데 돌아보니 한국에선 언젠가부터 주객이 전도된 것 같아. 설악산, 지리산 등 국립공원을 비롯한 전국 명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해 관광객을 끌어들여 돈을 벌겠다니.

이 글을 쓰던 중 기쁜 소식을 들었어.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려던 안을 문화재청이 무산시켰다는 기사. 근데 국립공원을 관리해야 할 환경부에선 허가를 내주고 문화재청에서 무산시켰다는 건 좀 웃긴 일이야. ‘국제자연보호연맹’이 내린 정의를 보면 국립공원이란 ‘인간에 의해 물리적으로 자연환경이 변화되지 않도록 보전’하는 데 최우선 가치를 둔대. 이에 따르면 케이블카를 설치하는 건 국립공원을 지정한 ‘목적’과 ‘취지’ 자체를 부정하는 거지. 관광수입을 올려야 한다는데, 그건 자연에 ‘앵벌이’를 시키겠다는 거잖아.

카보폴로니오 주변의 모래언덕.
나는 카보폴로니오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 발리사스까지 10킬로미터, 길고 긴 해안을 걷다가 바다사자의 사체를 지나치기도 하고, 바다달팽이의 알을 보기도 했어. 그러다 걸음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이 세지면 해안석 뒤에 앉아 한나절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곤 했어.

해가 지면 가로등도 없는 어둠 속을 손전등 밝히고 걸어가 마을에서 단 한 곳, 문 연 술집으로 갔지. 레게머리를 한 바텐더가 타주는 그라파미엘을 마시며 세상 끝으로 망명 온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어. 문을 열었다곤 했지만 문짝은 없었지. 찬바람이 가랑이를 쉴 새 없이 훑고 지나갔어. 우리는 서로의 웃음소리로 대서양에서 부는 바람과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지.

내 친구 치아고는 혼자 한 번, 나와 함께 또 한 번, 그렇게 두 번을 다녀오고도 내년에 다시 카보폴로니오로 올 거라고 했어. 고래가 수면 위로 올라와 숨을 쉬듯, 그는 숨 막히는 세상에서 벗어나 잠깐이나마 숨 쉴 은신처를 찾아낸 사람 같았지.

-카보폴로니오는 내가 영혼을 회복할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장소야!

히히히힝 어디선가 말 울음소리가 들렸어. 자정이 넘었구나. 숙소로 돌아오는 길. 천국보다 낯선 날이 내 영혼에 새겨지고, 문득 모래언덕을 넘어가는 별똥을 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어. 먼 훗날 누군가 나를 펼쳐볼 수 있다면, 지구를 보게 될 것이라고.

글·사진 노동효 여행작가

우루과이 카보폴로니오 바닷가에서 풀을 뜯고 있는 말들.

볕 좋은 날 숙소 마당에서 쉬고 있는 여행자.

카보폴로니오의 호스텔.

카보폴로니오의 호스텔 주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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