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노동효의 중남미 아미스타드
“이대로의 삶이 좋아” 친구들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알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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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로(뒷줄 왼쪽)와 함께 음악을 연주하며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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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랜드>, <비긴 어게인>, <원스>, <맘마미아>. 결말이 어떻게 끝나더라도 보고 나면 기분 좋아지는 영화가 있지. 음악영화 말이야. 칠레 푸콘에서 보낸 시간이 그랬어, 마치 뮤지컬 속으로 들어가 지내는 기분이었지. 알바로는 매일 제 노래를 연주했고 그의 집에 모여든 친구들은 뮤지컬 배우들 같았어. 오늘 저녁엔 하이라이트가 기다리고 있어. 알바로와 친구들의 콘서트. 돌아보면 이 공연을 보기 위해 푸콘에서 한 달을 지낸 것만 같아.
처음엔 닷새만 지낼 작정이었어. 닷새 지나 버스표를 사러 가려는데 알바로가 물었지. “이틀 더 머물지 않을래? 숙박비는 안 내도 돼. 내가 한턱내는 거니까.” 주말을 보내고 떠나라고, 친구들과 놀며 주말을 보내자고. 더구나 숙박비가 공짜라니! 그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어. “응, 좋아!” 대답할 때만 해도 몰랐지, 이틀이 지나도 떠날 수 없으리란 걸.
친구들과 비야리카 호숫가로 몰려가 노래하고 술을 마시며 주말을 보냈어. 그리고 아침이 밝았지. 떠나기가 싫었어. 난 제안했지. “나, 닷새 더 묵고 떠날까봐. 여기 5일치 숙박비.” 닷새가 지나 금요일이 찾아왔어. 출근하려던 알바로가 말을 건넸어. “월요일에 떠나지 않을래? 주말 숙박비는 내지 않아도 돼, 내가 초대하는 거니까.” 나는 월요일마다, 알바로는 금요일마다 서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주고받는 사이 한 달이 가버린 거야.
알바로 집에서 묵은 지 사흘 후부터 그는 아침 8시면 일어나 식사를 하고 호스텔 건축 현장으로 출근을 했어. 정오에 돌아와 식사하고 3시까지 휴식. 그리고 다시 일터로 가서 6시 무렵이면 집으로 돌아왔지. 난 국립공원에서 트레킹을 하거나, 야외온천을 찾아다니거나, 호숫가에서 수영을 하며 시간을 보내. 집으로 오는 길엔 슈퍼마켓에 들러 저녁거리를 샀지. 그러곤 알바로가 샤워하고 나와 컴퓨터를 켜고 먼 곳의 친구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동안 난 포도주를 홀짝이며 요리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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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기타 연주를 하는 알바로(사진 왼쪽)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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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5~6인분의 요리를 준비했어. 해 지면 거리에서 트럼펫을 부는 파트리쇼, 가죽공예품을 파는 로베르토, 양털공예품을 만드는 소라나 등등 친구들이 찾아올 테니까, 다들 배가 고플 테니까. 숙박비보다 식비를 더 쓴다는 계산 같은 건 하지 않았어. 어느새 내 집이 된 알바로의 사랑방에 찾아오는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생각만 했더랬지.
내가 만든 요리를 각자 접시에 담아 나눠 먹는 동안 먼저 식사를 마친 알바로는 기타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고 노래 불러. 식사를 끝내고 설거지를 마친 친구들은 차례차례 자신의 악기를 들고 알바로의 노래 속으로 끼어들지. 레퍼토리가 늘 같았으니까 알바로의 노래를 모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어. 그렇게 함께 노래하고 떠드는 것, 이들이 저녁을 보내는 방법이었어.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어.
“푸콘 외곽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로드리고입니다. 일전에 친구 따라 당신 집에 간 적이 있어요. 사람이 많았으니 절 기억하진 못할 겁니다. 아무튼 당신이 만든 노래를 저희 행사장에서 불러줄 수 있을까요? ‘카부르과의 눈동자’(푸콘 인근 폭포)에 있는 레스토랑이고, 1시간 공연에 5만페소를 드릴게요. 근데 혼자는 안 되고 밴드여야 합니다. 가능할까요?”
전화를 끊고 난 알바로가 환호성을 질렀어. “1시간 노래 부르는데 5만페소를 준대! 한번 해볼까?” 함께 할 밴드 멤버를 따로 구할 필요가 없었어. 다들 알바로의 노래를 알고 있었으니까.
기타 치며 공연하는 알바로와
함께 먹고 노래하며 지낸 한달…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사람
그 기록이 깨지고 있었어
열흘 후 공연일이 밝았어. 파트리쇼는 길거리 연주도 접고 알바로와 리허설을 하며 공연을 준비했어. 공연장까지 거리는 17킬로미터. 아무도 차를 갖고 있지 않았기에 저마다 손에 손에 악기를 들고 버스에 올랐어. 도심을 벗어난 버스가 들판을 달렸어. 황혼에 물들어가는 꽃들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지. 키 큰 나무가 늘어서 있는 정류장 앞에 버스가 섰어. 키보드, 드럼, 기타를 들고 찻길을 가로질러 레스토랑으로 갔어. 고급스런 실내장식에 넓은 마당이 있는 레스토랑이었어. 저녁이 되자 차량 한 대가 식당 앞에 서고 승객들이 내렸어. 식탁 앞에 앉은 손님들 앞에 하얀 접시들이 놓이고, 그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알바로와 내 친구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지. 난 가만히 눈을 감고 알바로의 목소리와 친구들의 연주 속으로 빠져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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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로와 친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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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관객들로부터 엄청난 환호를 받았어. 레스토랑 주인이 약속한 공연료의 2배를 줄 정도였지. 그리고 다음날.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어. 그날 레스토랑을 찾은 손님은 레코드사와 음악산업 관계자들이었어. 알바로의 노래를 사겠다고 했지. 알바로는 노래만 팔 수는 없다며 자신이 노래하고 친구들이 연주해야 한다고 대답했지. 그들은 곧 포기했어. 그러나 한 레코드사는 협상을 멈추지 않았어. 칠레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음반사라고 했어. 최후통첩이 왔을 땐 알바로가 샤워를 하던 참이라 파트리쇼가 전화를 받았어. 받아 적은 내용은 이랬어. ‘아마추어 연주자들로 녹음할 수 없음. 알바로만 필요. 24일까지 연락 바람. 수락시 25일 정오에 차를 보낼 테니 산티아고로 올 것.’
메모를 본 날부터 친구들은 알바로가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시간을 주기 위해 저녁이 되어도 그의 집을 찾아가지 않았지. 사흘 지나 25일 저녁. 거리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길에서 공예품을 팔던 친구들은 일을 마치고 저마다 알바로 집 앞을 하릴없이 지나갔어. 창마다 불은 꺼져 있었지. 밤 9시가 되어 트럼펫을 가방에 넣고 귀가하던 파트리쇼도 습관적으로 알바로 집 앞까지 오고 말았어. 집 안은 불이 꺼진 채 적막했어. 파트리쇼는 혼잣말을 했지. ‘떠났구나, 알바로. 잘 가게.’ 파트리쇼는 돌아서며 친구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렀어. 그때였어, 알바로의 집에 불이 켜진 건.
파트리쇼가 문을 두드렸어. 길 건너편에서 파트리쇼를 지켜보던 카를로스가 친구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날렸지. ‘알바로 집에 불이 켜졌어!’ 친구들이 하나, 둘 알바로 집으로 모여들었어. 알바로는 기타를, 파트리쇼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지. 사랑방에 모여든 친구들은 말없이 의자 하나씩을 차지하고 앉았어. 궁금해 못 참겠다는 듯 소라나가 입을 열었지.
“알바로, 왜 산티아고로 안 떠났니?” 2초간 침묵이 흐르고 알바로가 대답했어. “하하하, 지금이 가장 행복한데 뭘 찾아 어딜 간단 말이니?” 그러고선 알바로가 되물었어. “너도 그렇지 않아?” 소라나가 대답했어. “응!” 카를로스가 대답했어. “나도!” 로베르토가 대답했어 “나도!” “나도!” “나도!” 소리치던 친구들은 주섬주섬 각자의 악기를 꺼내 알바로와 파트리쇼가 연주하던 음악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어.
<라라랜드>의 한 장면처럼, 알바로와 친구들의 노래를 듣다가 내가 떠올린 상상이야. 물론 이 상상이 단지 상상은 아냐. 푸콘에서 내가 겪은 사건들의 변주된 조합. 알바로의 제안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보낸 첫 주말. 호숫가에서 자작곡을 부르던 알바로를 동영상으로 담았지. 그때 알바로가 물었어. “로, 촬영해서 어디에 쓰려고 그러니?” “멋지게 촬영해서 유튜브에 올리려고. 또 모르지, 네가 아주 유명해질지도!” “노, 노, 노. 그건 안 돼.” “왜?” “난 내 삶이 달라지길 바라지 않아. 난 이대로의 내 삶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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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품을 만들고 있는 알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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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가 넘어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어. 우린 다시 버스에 올랐어. 집으로 돌아와 우리만의 파티를 열었지. 오늘 콘서트를 끝으로 다음날 내가 떠나기로 되어 있었으니까. 알바로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을까봐 버스표까지 이미 사두었으니까.
친구들이 권하는 대로 술을 마시다가 취기가 돌았어. 바람을 쐬러 마당으로 나갔지. 파트리쇼가 뒤따라왔어. 뜰 한구석엔 갓 태어난 아기 고양이와 어미 고양이가 갸릉거리고 있었어. 파트리쇼가 스페인어도 영어도 아닌 말을 했어. “유… 굿 프렌드… 아이 노우… 노 솔로 볼리비아, 노 솔로 페루, 노 솔로 아르헨티나, 노 솔로 칠레…. 또도 문도 웰컴 유… 아이 노우… 유 코라손 디퍼렌테….” 파트리쇼의 스팽글리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이제 나도 잠들 시간. 눈을 감고서야, 떠날 때가 되어서야 난 알게 되었어. 내 여행의 기록이 깨지고 말았다는 것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사람, 여행길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사람에 대한 기록이…. 당신도 알고 있니?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깨질 때마다 찾아오는 벅찬 기쁨을. 세상엔 아름다운 사람들이 무수히 많이 존재하고 있었어.
노동효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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