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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7.20 20:33 수정 : 2016.07.21 09:53

픽사베이

[매거진 esc] 허지웅의 설거지
나는 어쩌다 ‘처음’으로 복구하는 데 매달리게 됐나

이건 청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걸레를 왼쪽으로 비틀어 짰다. 짜고 나서야 매번 생각이 난다. 이걸 나는 걸레점이라고 부르는데 아무튼 오른쪽으로 비틀 때와 왼쪽으로 비틀 때의 점괘가 다르다. 무슨 내용인지는 비밀이다. 바닥과 선반, 책상과 책장 순서로 닦아 낸다. 그리고 청소기에 전원을 넣어 그 반대 순서로 쓸어낸다. 걸레질을 먼저 하고 청소기를 나중에 돌려야 물기에 붙어 있는 먼지를 없앨 수 있다. 걸레질을 나중에 하면 여기저기 먼지를 발라놓는 꼴이 된다. 그렇게 물기와 함께 말라버린 먼지나 머리카락은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청소기 브러시를 용도에 맞게 바꾸어 끼워가며 중력 방향으로 단계를 나누어 쓸어내다 보면 대충 아침 청소가 마무리된다.

피규어나 장식품들에 묻은 먼지는 일주일에 두어 번 먼지떨이로 닦아 낸다. ‘터는’ 게 아니라 ‘닦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지떨이에 정전기를 먼저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창문 밖으로 세게 몇 차례 털어주고 시작하면 좋다. 먼지떨이에도 종류가 많다. 털 빠짐과 정전기, 기름기의 정도 따위가 전부 다르다. 정전기와 기름기는 서로 보완해주는 성격이다.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높으면 제대로 쓰지 못한다. 이건 영업비밀인데 타조털이 가장 훌륭하다.

청소보다 중요한 건 정리다. 배는 구획별로 구조를 나누어 침수가 되더라도 가라앉지 않게 만드는데, 집 정리도 그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정리가 된 집에 들어갈 때는 단단하게 발을 디디는 기분이 들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딘가 기분 나쁘게 스며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정리가 직관적으로 잘되어 있으면 매일 하는 청소는 십분이면 충분하다. 정리가 되어 있는 집은 청소를 하루이틀 하지 않아도 티가 나지 않는다. 정리의 묘는 얼마나 잘 감추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버리느냐에 달려 있다. 내게 쓸모가 없는 건 남들에게 필수품이라 해도 모으지 말아야 하고 일단 모았다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큰 지혜가 필요하다.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은
최선을 다하지 않게 하고
사람을 비겁하게 만든다
실패한 관계는 대개 그랬다”

언제부터 주변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일에 강박을 느끼게 되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별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스무 살 이후로 계속 혼자 살았으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게 아닐까 싶다. 뭔가를 깨끗하게 만들어놓고 내심 기뻤던 첫 번째 기억은 설거지였다. 초등학생이었다. 엄마가 외출한 사이 설거지를 해놓고 싱크대를 닦았다. 행주로 물을 훔쳐내자마자 생각보다 쉽게 광이 올라와서 정말 신이 났다. 엄마가 기뻐해주어서 내심 흡족했다. 그 뒤로 몇 시간 동안 싱크대 앞을 서성대면서 아버지나 동생이 사용하고 나면 바로 뒤이어 다시 닦아놓고는 생색을 냈다.

처음으로 완벽하게 청소를 했다, 는 실감을 한 건 대학생 때였다. 고시원 쪽방에 살면서 청소를 게을리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나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다. 냉장고를 고시원에 가져가면 된다. 대체 그 책상을 어떻게 방에 넣었을까. 문을 열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책상이 방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며 한쪽 면을 온전히 가리고 있다. 잘 때는 의자를 책상 위로 올려놓고 다리를 그 안에 집어넣어야 한다. 두 팔을 벌리는 건 불가능하다. 옷이나 가방은 벽에 걸어둔다. 창문도 없다.

요컨대 남아도는 공간이 없다는 이야기다. 방이 조금이라도 더러우면 그건 다 내 몸에 묻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옷에 묻는다. 세탁기가 공용이라 빨래를 자주 하는 것이 곤란해서 나는 옷 대신 방을 최대한 깨끗하게 유지하는 쪽을 택했다. 매일 두 번씩 천장까지 닦았다. 이후로 이사를 여러 번 다니며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 크고 쾌적해졌다. 하지만 고시원에 살 때만큼 내가 사는 공간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청소란 그 공간을 완전히 이해하게 만든다.

지금도 집 청소는 내가 한다. 써놓고 보니 당연한 말이다. 나는 인류가 자기 혼자 힘으로 청소할 수 없는 크기의 집을 소유하면서부터 파멸을 향한 과잉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사람이다. 부동산 취득 자격면허 같은 걸 만들어서 시험장에서 혼자 청소할 수 있는 최대 평수를 딸 수 있게 만들면 좋겠다. 사람의 욕심을 다스릴 수 있는 가장 기능적인 목적의 면허가 아닌가. 이 집을 사겠습니다. 아이고 사장님 안목이 역시 남다르십니다, 그럼 면허를 보여주세요. 아니 2급 보통이군요. 사실 수 없습니다, 나가주세요.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청소에 관한 질문을 자주 받게 된다. ‘언제부터 그랬어요? 왜 그렇게 됐어요?’라는 질문에 말문이 막히는 경험을 몇 차례 겪었다. 나는 왜 청소를 할까. 대충 결벽증이라고 매번 둘러대지만 솔직히 그건 아닌 것 같다. 손은 자주 씻는 편이지만 그건 내가 만지는 물건들, 특히 키보드에 기름기가 남을까봐 그러는 것이다. 원고를 쓸 때 키보드가 끈적거리면 멀쩡한 문장도 비문이 된다. 키보드에 묻은 기름기는 키캡을 전부 분리해 닦아야 하기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나는 남의 먹던 숟가락도 쓰고 내 살보다는 남의 살을 훨씬 더 좋아하며 타인의 청결함을 두고 그 사람을 판단하지도 않는다. 깨끗하게 보이는 것보다는 어울리는 옷을 입는 게 더 좋아서 같은 옷을 여러 벌 사놓고 돌려 입는다. 그게 다 결벽증 증상이라고 하면 뭐 별로 할 말은 없지만.

나는 내가 무언가를 처음 상태로 되돌려놓는 일에 지나치게 매달린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언제든지 눈앞의 이걸 본래의 상태로 복구시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안정감을 찾는 것 같다. 그러나 여태 살아보니 본래 상태로 온전히 복구시킬 수 있는 거라고는 컴퓨터 복원과 청소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청소에 매달린다. 청소를 하면 회복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붙잡고 되돌려지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 늘 너무 오랫동안 분개했던 것 같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랬다. 거기에는 어떤 오해나 실수가 있더라도 어찌됐든 돌이킬 수 있어야만 진짜 우정이고 진짜 사랑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진짜 사랑과 진짜 우정이란,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서로 다른 논리들 앞에서 유명무실해진다. 사실 언제든 돌이킬 수 있다는 믿음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않게 하고 결과적으로 사람을 좀 비겁하게 만든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최소한 내가 실패한 관계들은 대개 그랬던 것 같다. 결국, 우리는 모두 순순히 누군가의 과거가 될 용기가 필요하다. 돌이키고 되돌리는 것에 대한 집착은 좀 느슨하게 내버려두고 말이다. 청소는 이제 좀 지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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