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11.16 10:06
수정 : 2018.11.16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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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7.27’ 담배. 김포그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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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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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7.27’ 담배. 김포그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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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수의 최전방을 지키는 이가 있다. 나의 가족 중 한 사람이 그렇다. 오죽하면 별명이 ‘김보수’이겠는가! 그는 반공 교육을 성실히 받은 결과 북한을 여전히 싫어한다. 주말에는 남대문을 찾아 ’북한에 그만 퍼주라’는 구호를 외치는 태극기부대의 행렬에 합류해 조용히 서울 시내를 걷다가 근처 갈치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게 일이었다.
남북평화가 사실상 도래한 마당에, 그도 이 평화의 물결에 동참하면 얼마나 좋을까.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어렵다면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래서 지난 주말 중국 상하이에 있는 한 북한식당으로 그를 데려갔다. 평양고려호텔의 일등 요리사가 직접 만든 평양냉면을 맛보고, 북한 현지인의 공연을 본다면 그의 얼었던 마음도 조금은 녹지 않을까.
그러나 보수의 최전방을 무너뜨리는 건 쉽지 않았다. “북한식당에 오다니 국가보안법을 어기는 일”이라며 그는 언짢아 했다. 그래도 포기 않고 평양냉면 두 그릇을 주문했다. 손님들을 위해 북한 종업원들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감동적인 공연을 펼쳤지만 역시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다른 한국 손님들 중에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평양냉면만을 묵묵히 비워낼 뿐이었다.
그래도 음식을 다 먹었다는 건 마음이 열렸다는 증거! 이번엔 북한 담배, 북한 술들이 진열돼 있는 선물 코너로 안내했다. 그 앞에 분홍색 한복을 입고 서 있던 북한 종업원도 내 마음을 알았는지, 보수씨를 보자마자 “이 담배는 북한에서 아주 고오급∼담배입니다”라고 반색하며 설명했다. 흰색 곽에는 ‘7.27’이라고 써져 있었다. 애연가인 보수씨도 담배 곽을 만지작거리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옳거니, 됐다! 신이 난 나는 종업원에게 “7.27 뜻이 뭐죠?”라고 물었다. 종업원은 활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 “6·25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한 날입네다∼” 아뿔싸! 그의 얼굴이 시꺼멓게 굳어지는 게 보였다.
당황한 나는 급히 다른 담배 곽을 집어 들었다. ‘강선’이라는 이름의 담배였다. “이, 이 담배도 좋아 보이는데요.” ‘6·25전쟁에서 승리한 날’이라는 얘기에 이미 공황 상태에 빠진 그에게 급히 다른 담배를 권했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이번에는 종업원에게 묻지 않고 직접 ’강선’의 뜻을 찾아 보기로 마음 먹었다.
북한의 아름다운 지역 명이겠거니 하고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휴대전화 검색창에 ‘북한, 강선’을 검색해 보수씨에게 보여주는 순간, 헐… ‘북한 비밀 핵시설, 강선?’이라는 기사 제목들이 주르륵 떴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눈을 질끈 감고 ‘흠…’ 노기 띈 신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평화의 여행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북한을 미워한다. 다만 요즘에 그는 갈치식당보다는 냉면집을 즐겨 찾는다고 한다.
김포그니 기자 pogn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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