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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2.28 19:17 수정 : 2016.12.28 20:25

[ESC] 김민철의 가로늦게
새 다이어리에, 망한 글씨로, 망한 새해목표를 매번 써넣는 나에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31일은 늘 새해 소망을 적는 날이다. 김민철 제공
29살의 내가 29살의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뜬금없이. 다짜고짜.

“왠지 남미에 가기에 38살은 너무 늦은 것 같지?”

뜬금없는 내 질문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남자친구가 대답했다. 아마도 별생각 없이.

“응.”

뜬금없는 질문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왠지 남미에 가기에 36살은 너무 이른 것 같지?”

남자친구는 착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래서 그는 또 대답했다.

“응.”

두 번의 “응”이라는 대답을 원료로 삼아 나는 말했다.

“그래, 남미는 37살이야.”

밑도 끝도 없이 37살이란 확신이 들었다. 유럽도 아니고, 동남아도 아니고, 미국도 아니고, 남미라면 37살에 가야 할 것 같았다. 36살엔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어설픈 시간만 보내다 돌아올 것 같았고, 38살에 갔다가는 나태하게 시간을 버리다 돌아올 것 같았다. 하지만 37살이라니! 37이란 숫자는 어딘가 예민해 보였고, 뾰족뾰족한 모험에 적합해 보였다. 그렇게 내게 남미는 37살의 대륙이 되었다. 37이라는 숫자가 지나치게 멀리, 그 어떤 현실성도 없이 존재하던 29살 때의 결심이었다.

며칠이 지나면 나는 38살이 된다. 그러니까 지금 나에겐 37살로 존재할 수 있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37살의 남미라는 계획은 어떻게 되었냐고? 진짜 다녀왔냐고? 설마. 그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29살 때 멀게만 느껴졌던 남미라는 대륙은 37살에도 여전히 너무 멀었다. 꿈조차 꿀 수 없을 정도로. 계획조차 세울 수 없을 정도로. 37살의 남미라는 목표는 실패로 돌아갔다. 항공권도 알아본 적 없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남미’라는 목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37년 동안 세운 수많은 새해 목표들처럼.

왼손으로 글씨쓰기, 영어, 다이어트
‘반복해온 실패’를 또 새해목표로
“희망의 근거는 단순하다
다음에 벌어질 일을 모른다는 것”

새해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또 이야기는 길어진다. 해마다 12월31일이 되면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텔레비전 앞에 엎드렸다.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연기대상을 틀어놓고, 다음 한 해를 맞이하는 의미에서 새 다이어리를 쫙 폈다. 한 달 전부터 서점에서 고심해 고른 내년 다이어리였다. 그리고 맨 첫 페이지에 새해 목표를 써내려갔다. 정성스럽게. 너무 정성스럽게 쓰려다 보니 늘 첫 글씨부터 망해버리는 건 나의 오랜 전통이었다. 에이씨, 또 망했네.

망한 글씨로 써내려가건 어쨌건 새해 목표 1번은 늘 정해져 있었다. ‘왼손 글씨 잘 쓰기’. 바뀌지도 않았다. 해마다 같은 목표였다. ‘올해는 꼭 왼손 글씨 정복하기’. 그렇다. 해마다 실패하면서 해마다 고집스럽게 그 목표를 고수했다.

왼손잡이가 되고 싶다는 꿈. 가수 이적이 삐죽삐죽한 외계인 머리를 하고, 왼손에 마이크를 들고 나와 ‘난 왼손잡이야. 라라라라라라라라~’라며 노래를 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나는 왼손잡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른손잡이인 내게, 왼손잡이는 개성의 총집합체처럼 보였다. 내가 노트를 똑바로 놓고 쓸 때 왼손잡이들은 노트를 왼쪽으로 45쯤 기울이고 글씨를 써내려갔다. 그 각도가 정확히 개성의 각도로 보였다. 내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글씨를 써내려갈 때 왼손잡이들은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글씨를 써내려갔다. 그 방향이 천재성의 방향으로 느껴졌다.

천재 혹은 예술가는 왼손 글씨라는 근거 없는 믿음. 확실한 건 나는 천재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예술가로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거니까 열심히 왼손 글씨를 연습해서 그 간극을 메우고 싶었다. 그 간극이 왼손 글씨 따위로 메워질 리 없었지만 그땐 그런 것도 모르는 아주 어린 나이였으니까.

주변에 왼손잡이가 많았냐고? 혹은 왼손으로 글씨를 써내려가는 천재 혹은 예술가가 주변에 있었냐고? 전혀 아니었다. 내가 만난 유일한 왼손잡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짝꿍이었다. 유난히 말썽을 많이 부리고, 유난히 여자애들을 많이 괴롭히고, 유난히 친구들을 많이 때리고, 심지어 유난히 누런 콧물을 1년 내내 흘리는 아이였다.

담임 선생님은 나이가 꽤 많은 할머니 선생님이었는데, 그 친구의 왼손 글씨를 유독 미워하셨다. 아무리 이 친구의 왼손 글씨를 고치려고 해도 고쳐지지 않으니 하루는 그 친구의 왼손을 고무줄로 묶어버리셨다. 그리고 나에게 잘 감시하라는 지령까지 내리셨다. 친구는 누런 콧물을 소매로 닦아가며 울었다. 울면서 오른손으로 글씨를 썼다. 지금 생각하면 뭘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왼손이 무슨 잘못이라고, 왜 다들 오른손으로 글씨를 써야 하는 거냐고요 하고 선생님에게 대들었어야 했다 싶지만 그땐 그냥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으니까. 어쨌거나 나의 왼손잡이 사랑엔 롤 모델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새해 목표 1번은 언제나 ‘왼손 글씨 잘 쓰기’였다.

결과는? 왼손 글씨는 남미와 같은 운명에 처하고야 말았다. 거대한 실패. 심지어 해마다 거대한 실패를 거듭했다. 왜? 연습을 안했으니까. 그냥 쭉 오른손으로만 썼으니까. 가끔 생각나면 왼손으로 몇 글자, 정말 몇 글자 끄적인 후에 ‘아직 잘 안 되네’라며 포기해버렸으니까.

계속 1번 목표 이야기만 할 수는 없으니 2번 목표도 이야기를 해보자면, 2번 목표는 ‘영어 잘 하기’였다. 잘 하기? 얼마나 잘? 미국 사람처럼 잘? 학원 선생님처럼 잘? ‘잘’이라는, 기준도 애매한 목표를 잡아놓고 나는 늘 ‘올해에는 영어를 잘하고야 말겠어’라는 다짐을 했다.

외모에 관심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3번 목표는 자연스럽게 ‘5㎏ 빼기’가 되었다. 다이어트 하나 정도는 들어가 있어줘야 새해 목표의 무게중심이 맞으니까. 그래 내년에는 꼭 살을 빼는 거야. 앞자리를 바꿔보는 거야. 언제나 같은 다짐이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눈치챘겠지만, 1번 목표가 거대한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2번 목표와 3번 목표도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영어는 중학교 때 이후로 계속 하락세를 그리고 있는 중이고, 체중은 그때 이후로 계속 상승세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왼손 글씨 연습은 꾸준하지 않았지만, 영어 하락곡선과 지방 상승곡선은 지금까지도 꾸준하다. 나는 새해 목표 앞에선 ‘꾸준한 실패자’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 꾸준한 실패가 쌓여 또 지금의 내가 되어버린 것이다.

2016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12월31일,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2017년의 새해 목표를 써내려갈 것이다. 어쩌면 또 실패로 돌아가버릴 수도 있지만,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기적의 자리를 마련해놓고 2017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게 희망의 근거는 단순하다. 우리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모른다는 것, 세상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과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꽤 자주 벌어진다는 것.’(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중)

김민철 카피라이터·<모든 요일의 여행>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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