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김민철의 가로늦게
새 다이어리에, 망한 글씨로, 망한 새해목표를 매번 써넣는 나에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31일은 늘 새해 소망을 적는 날이다. 김민철 제공
|
‘반복해온 실패’를 또 새해목표로
“희망의 근거는 단순하다
다음에 벌어질 일을 모른다는 것” 새해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또 이야기는 길어진다. 해마다 12월31일이 되면 나는 경건한 마음으로 텔레비전 앞에 엎드렸다. 한 해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연기대상을 틀어놓고, 다음 한 해를 맞이하는 의미에서 새 다이어리를 쫙 폈다. 한 달 전부터 서점에서 고심해 고른 내년 다이어리였다. 그리고 맨 첫 페이지에 새해 목표를 써내려갔다. 정성스럽게. 너무 정성스럽게 쓰려다 보니 늘 첫 글씨부터 망해버리는 건 나의 오랜 전통이었다. 에이씨, 또 망했네. 망한 글씨로 써내려가건 어쨌건 새해 목표 1번은 늘 정해져 있었다. ‘왼손 글씨 잘 쓰기’. 바뀌지도 않았다. 해마다 같은 목표였다. ‘올해는 꼭 왼손 글씨 정복하기’. 그렇다. 해마다 실패하면서 해마다 고집스럽게 그 목표를 고수했다. 왼손잡이가 되고 싶다는 꿈. 가수 이적이 삐죽삐죽한 외계인 머리를 하고, 왼손에 마이크를 들고 나와 ‘난 왼손잡이야. 라라라라라라라라~’라며 노래를 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나는 왼손잡이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른손잡이인 내게, 왼손잡이는 개성의 총집합체처럼 보였다. 내가 노트를 똑바로 놓고 쓸 때 왼손잡이들은 노트를 왼쪽으로 45쯤 기울이고 글씨를 써내려갔다. 그 각도가 정확히 개성의 각도로 보였다. 내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글씨를 써내려갈 때 왼손잡이들은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글씨를 써내려갔다. 그 방향이 천재성의 방향으로 느껴졌다. 천재 혹은 예술가는 왼손 글씨라는 근거 없는 믿음. 확실한 건 나는 천재로 태어나지도 않았고, 예술가로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거니까 열심히 왼손 글씨를 연습해서 그 간극을 메우고 싶었다. 그 간극이 왼손 글씨 따위로 메워질 리 없었지만 그땐 그런 것도 모르는 아주 어린 나이였으니까. 주변에 왼손잡이가 많았냐고? 혹은 왼손으로 글씨를 써내려가는 천재 혹은 예술가가 주변에 있었냐고? 전혀 아니었다. 내가 만난 유일한 왼손잡이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짝꿍이었다. 유난히 말썽을 많이 부리고, 유난히 여자애들을 많이 괴롭히고, 유난히 친구들을 많이 때리고, 심지어 유난히 누런 콧물을 1년 내내 흘리는 아이였다. 담임 선생님은 나이가 꽤 많은 할머니 선생님이었는데, 그 친구의 왼손 글씨를 유독 미워하셨다. 아무리 이 친구의 왼손 글씨를 고치려고 해도 고쳐지지 않으니 하루는 그 친구의 왼손을 고무줄로 묶어버리셨다. 그리고 나에게 잘 감시하라는 지령까지 내리셨다. 친구는 누런 콧물을 소매로 닦아가며 울었다. 울면서 오른손으로 글씨를 썼다. 지금 생각하면 뭘 그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왼손이 무슨 잘못이라고, 왜 다들 오른손으로 글씨를 써야 하는 거냐고요 하고 선생님에게 대들었어야 했다 싶지만 그땐 그냥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으니까. 어쨌거나 나의 왼손잡이 사랑엔 롤 모델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새해 목표 1번은 언제나 ‘왼손 글씨 잘 쓰기’였다. 결과는? 왼손 글씨는 남미와 같은 운명에 처하고야 말았다. 거대한 실패. 심지어 해마다 거대한 실패를 거듭했다. 왜? 연습을 안했으니까. 그냥 쭉 오른손으로만 썼으니까. 가끔 생각나면 왼손으로 몇 글자, 정말 몇 글자 끄적인 후에 ‘아직 잘 안 되네’라며 포기해버렸으니까. 계속 1번 목표 이야기만 할 수는 없으니 2번 목표도 이야기를 해보자면, 2번 목표는 ‘영어 잘 하기’였다. 잘 하기? 얼마나 잘? 미국 사람처럼 잘? 학원 선생님처럼 잘? ‘잘’이라는, 기준도 애매한 목표를 잡아놓고 나는 늘 ‘올해에는 영어를 잘하고야 말겠어’라는 다짐을 했다. 외모에 관심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3번 목표는 자연스럽게 ‘5㎏ 빼기’가 되었다. 다이어트 하나 정도는 들어가 있어줘야 새해 목표의 무게중심이 맞으니까. 그래 내년에는 꼭 살을 빼는 거야. 앞자리를 바꿔보는 거야. 언제나 같은 다짐이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눈치챘겠지만, 1번 목표가 거대한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2번 목표와 3번 목표도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영어는 중학교 때 이후로 계속 하락세를 그리고 있는 중이고, 체중은 그때 이후로 계속 상승세를 그리고 있는 중이다. 왼손 글씨 연습은 꾸준하지 않았지만, 영어 하락곡선과 지방 상승곡선은 지금까지도 꾸준하다. 나는 새해 목표 앞에선 ‘꾸준한 실패자’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 꾸준한 실패가 쌓여 또 지금의 내가 되어버린 것이다. 2016년도 며칠 남지 않았다. 12월31일,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2017년의 새해 목표를 써내려갈 것이다. 어쩌면 또 실패로 돌아가버릴 수도 있지만,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기적의 자리를 마련해놓고 2017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게 희망의 근거는 단순하다. 우리는 다음에 벌어질 일을 모른다는 것, 세상에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과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꽤 자주 벌어진다는 것.’(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중) 김민철 카피라이터·<모든 요일의 여행> 지은이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