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7.05.25 15:23 수정 : 2007.05.25 17:02

박준형 감독은 새 영화를 찍기 전, 도시를 돌아다니며 액션 장소를 물색한다. 대부분 그가 사는 동네 주변이다. 5층 건물의 난간과 난간을 뛰어다니는 박 감독.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대한민국 청소년을 위해” 건물 사이를 겁없이 뛰어다니는 독립영화감독의 꿈

액션영화 속 주인공은 절대 총을 쏘지 않던 시대가 있었다. 악당들이 아무리 총질을 해대도 주인공은 총알 사이로 용케 피해 다녔다. 주인공의 무기는 다람쥐처럼 잽싼 몸 하나뿐이었다. 주인공은 몽둥이를 들고 달려오는 적들의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갔고, 적들은 서로 부딪쳐 자멸했다. 주인공은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욕도 내뱉지 않았다. 욕하며 덤비는 적들은 제 꾀에 넘어가 쓰러질 뿐이었다. 시뻘건 피도 등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변했다. 착한 영화 시대가 지나고 나쁜 영화 시대가 온 것이다.

박준형 감독을 만났다. 28살. 2004년 미장센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독립영화 <어느 날>의 감독. 그는 지난 10일 인천 가좌동의 도심 절벽에 서 있었다. 음식점과 당구장과 교회가 차곡차곡 쌓인 5층 건물의 끄트머리. 난간에 선 그가 갑자기 ‘낄낄낄’ 웃었다. 그리고 세로로 누워서 난간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놓았다. 약 1 높이. 아래는 시멘트 바닥 골목이다. “겁이 나면 원래 이렇게 웃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웃다가 숨을 들이마시다가 다시 웃었다.

하나, 둘, 셋. 그의 두 손이 허공을 갈랐다. 오른발이 난간 위로 솟았다.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떴다. 착지. 2m를 날았다. 성공이다.

육교와 방음벽을 오르내리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에게 왜 액션을 하느냐고 물었다. “청소년 여러분을 위해서 ….” 항상 그렇듯 그는 이 말로 대답을 시작했다.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 스파이더맨이 건물을 기어올랐듯이, 청룽(성룡)이 악당들을 골려줬듯이, 그는 대한민국 청소년을 위해 건물과 건물을 뛰어다니고 맨손으로 담벼락을 오른다. 그가 내세우는 건 ‘공익 액션’ 영화다. 류승완 감독과 배우 류승범은 공익 액션을 표방한 <어느 날>을 보고 작품 출연을 약속했다.

악당에 쫓기다가도, 그는 신호등을 보고 멈춘다. 담배 연기를 무척 싫어하고, 깨질 ‘위기’에 처한 수박과 화분도 구출한다.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는 ‘바른 생활’ 청년이다. 그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도 청소년들에게 바른 생활을 전파하기 위해서다. 나쁜 녀석, 나쁜 여자, 나쁜 영화가 세련된 아이콘이 되는 이 시대에 공익 액션은 성공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건전 영웅’을 꿈꾸는 그를 따라가 봤다.



“야, 스파이더맨이다”

육교 기둥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오는 괴물, 박준형의 이상한 야마카시

박준형 감독 (28)
도시는 그의 놀이터였다. 놀이터의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정글짐에 올라가듯이, 그는 부드럽게, 육교 기둥을 타고 내려와 방음벽을 기어올랐다. 난간은 뜀틀이었고, 기둥은 미끄럼틀이었다. 인천 가정동 콜롬비아 공원에 산책 나온 사람들은 “야! 스파이더맨이다”라고 소리쳤다.

코스모스산은 그의 ‘소림사’

사실 박준형은 독립영화 감독보다는 ‘야마카시 고수’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야마카시에 열광하는 10대들은 그를 ‘대한민국 야마카시의 1인자’라고 부른다.

야마카시. 1990년대 말 프랑스 뒷골목 아이들 놀이에서 유래됐다는 이 괴상한 행위는 맨몸으로 도시의 장애물을 뛰어넘고 매달리고 가로지르는 행위다. ‘파쿠르’ 혹은 ‘프리러닝’이라고도 불리는 야마카시는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10대들 사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가 야마카시의 대표 주자로 부상한 것은 2003년 문화방송 에 출연한 뒤부터다. 그는 영화감독이 아닌 ‘괴인’ 스파이더맨으로 출연했다. 철봉에 가로로 매달리는 ‘가로 본능’을 시연하고, 높이가 수십 미터에 이르는 골프 연습장의 철제 빔에 매달렸다. 10대들은 그에게 팬레터를 보냈다. ‘폼 나는’ 야마카시 기술을 전수해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른 생활’ 청년이 아이들에게 보낸 건 ‘따분한 충고’였다. “훈련은 정성입니다.”

인천시 가좌동 코스모스산 약수터. 박준형으로 치자면, 약수터는 소림사 같은 곳이다. ‘야마카시 고수’로 불리기까지, 그는 10여년을 이곳에서 수련했다. 5월10일, 그는 약수터를 다시 찾았다. 부천으로 이사간 뒤, 지금은 문득 그리울 때 찾는 곳. 그는 산길을 오르며 “소림사 승려들처럼 이 길을 손발로 기어서 내려갔다”고 말했다.

약수터엔 철봉 여섯과 평행봉 하나가 전부다. 철봉과 평행봉에 칠해진 녹색 페인트는 박준형의 땀에 미끄러져 사라졌다. 그는 홈경기를 치르듯 체력훈련을 시작했다. 체력훈련은 자체 제작한 일정표와 원칙에 따라 진행된다. 그의 트레이너는 손목시계. 그는 “보통 쉬는 시간을 1분으로 제한한다. 시계 알람이 울리면, 다시 철봉에 매달린다”고 말했다.

매달리고 쉬고, 매달리고 쉬고, 한 번 운동에 최소 한두 시간이다. 종목은 철봉, 평행봉, 산 달리기, 모래주머니 차고 달리기, 기어서 산길 내려가기 등등. 최소한의 도구를 이용하고, 몸을 지탱해서 하는 운동은 무엇이든지 한다. 철봉운동도 다양화했다. 턱걸이, 두 손가락 턱걸이, 한 손으로 매달려 몸 돌리기, 두 손으로 매달려 다리 올려 버티기. 이 밖에도 많다.

코스모스산 약수터는 박준형의 ‘소림사’다. 그는 철봉과 평행봉으로 수십가지의 훈련을 고안했다. 두 손가락으로 몸을 지탱하기도 하고, 가로로 철봉에 매달리기도 한다.

야마카시와는 미세한 동작 차이

야마카시 고수가 된 비법을 알려달라는 청소년들의 쇄도하는 요청에, 그는 훈련 동영상까지 만들어 공개했다.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던 ‘박준형 훈련법’. 그는 이를 ‘평화를 위한 훈련’이라고 부른다. 같은 이름의 그의 누리집(iyagipictures.co.kr)에는 이렇게 써놓았다.

“제가 훈련을 시작한 목적은 크게 아래와 같습니다. ①몸과 마음을 다스려 죄를 짓지 아니하고 타락하지 않으며 바른 길을 걷기 위함. ②앞으로 다가올 여러 가지 고통을 대비하기 위함. ③이 세상과 저 세상에 고통받는 분이 단 한 분도 안 계실 수 있도록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함 ….”

훈련 중에 그는 화두를 붙든다.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쉬우나 올라가는 것은 쉽지 않다.” “모래알 하나도 무시해선 안 된다.” ‘술, 담배’도 훈련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유치원 때 친구네 집에서 담배를 한 번 물어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게 그의 고백이다. 마치 도를 닦으며 무술을 연마하던 무림시대로 돌아간 듯하다. 이렇게 얻은 근력과 담력, 인내력은 그를 야마카시의 대가로 만들었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도’ 옥상과 옥상을 뛰어다니고 빗물 홈통을 타고 내려온다. 모두 공익 액션을 위한 훈련이다.

하지만 그는 “야마카시와 나는 관계없다”고 말한다. 그가 훈련을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인 9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 야마카시가 유행하기 전이다. 게다가 그의 액션과 야마카시는 미세한 동작의 차이가 있다. 야마카시에선 낙법과 점프가 잦지만, 그의 액션에서 찾아보기 어렵다.(그는 낙법을 배운 적도 없다) 그는 구조물을 자연스럽게 타고 내려가는 부드러운 액션을 추구한다.

공익 액션영화로 꿈을 주고 싶다

사실 야마카시의 뿌리를 청룽(성룡)의 액션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80년대 영화에서 청룽은 맨몸으로 도시에서 뛰고 날고 점프한다. 청룽의 맨몸 액션은 도를 추구하던 중국의 전통무예(쿵푸)와 얇게 겹친다. 박준형의 ‘평화를 위한 훈련’에서도 그 도의 자락이 읽힌다. 그의 영화 교과서도 버스터 키튼과 청룽의 슬랩스틱 액션이다. 그리고 그는 폭력 없는 길거리 ‘공익 액션’을 지향한다. 버스터 키튼과 청룽의 액션은 그가 보기에 별로 비폭력적이지 않지만, 그나마 그의 모범이다.

박준형은 도시에서 도를 구한다. 야마카시(자신은 부인하지만)로 도를 구한다. 공익 액션영화로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어한다. 혹자는 그를 새마을운동 시대의 ‘바른 생활 청년’이라고 힐난하지만, 폼만으로 멋을 추구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진정성이 있다. 그는 “이번주 토요일 약수터에서 고교생 두 명을 만나 평화를 위한 훈련을 알려주기로 했다”며 “그 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했다.

글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 커버스토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