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16 20:42
수정 : 2019.10.16 20:48
|
그림 김태권 만화가
|
김태권의 지옥 여행
|
그림 김태권 만화가
|
얼마 전 에스엔에스(SNS)에 돌던 우스갯소리. ‘나라 이름을 따서 원소 이름을 짓기도 하더라. 프랑스는 프랑슘, 미국은 아메리슘, 일본은 니호늄. 한국은 이름을 딴 원소가 없어 아쉽네.’ ‘없긴 왜 없어, 헬조선이니 헬륨이잖아.’
당연히 말장난이다. 헬륨의 어원은 ‘헬리오스’, 그리스신화 속 태양신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냥 태양을 부르던 그리스말이기도 하다. 한편 헬조선이라는 말은 아시다시피 ‘헬’과 ‘조선’의 합성어. 그나저나 궁금하다. 지옥을 뜻하는 ‘헬’이란 말은 또 어디서 왔을까.
영어단어 ‘헬’(hell)은 ‘헬’(Hel)이라는 말에서 왔다. 헬 또는 헬헤임은 북유럽신화 속 지옥의 이름이다. 그런데 헬은 지옥치고도 독특하다. 마침 북유럽 신화의 원전인 <에다>도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으니 다른 종교와 신화에서 설명하는 지옥과 헬을 비교해보자.
우선 궁금한 문제. 어떤 사람이 헬에 가나? <에다>의 설명은 왔다갔다 한다. <에다> ‘귈피의 홀림’ 3장에는 악한 사람이 헬로 간다고 했다. 그런데 34장에 보면 헬에는 ‘늙어 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이 거주한다는 것.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옛날 북유럽 사람 보기에 전쟁터에서 죽을 각오를 안 하는 이는 나쁜 사람이라는 걸까? 나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갈 놈’ 소리를 자주 들었을 것이다.
북유럽 신화에도 천국 비슷한 곳이 있다. “올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 간다는 ‘김레’도 있지만, ‘발할’이라는 이름의 낙원이 유명하다. 그런데 발할은 보통 상상하는 천국과 퍽 다르다. 발할의 거주민은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은 용사들이다. 잠에서 깨자마자 무기를 집어 들고 뛰쳐나가 자기들끼리 싸워 상대를 찢어 놓는다. 아침마다 이 짓을 되풀이한다나. 이런 살벌한 곳이 천국이라면 나는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도 옛날 북유럽 사람은 헬 말고 발할에 가고 싶어 했다. 늙어 죽게 된 바이킹이 전사자 대접을 받고 싶어 칼과 창으로 자해할 정도였다나. 왜 그렇게 헬을 싫어했을까? <에다>에는 죽은 사람을 꼬챙이로 찌르며 괴롭히는 지옥의 악마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데 말이다.
헬의 위치가 수수께끼를 푸는 실마리 같다. 헬은 어디쯤 있을까? 북유럽신화에서는 신도 죽는다. 신들 가운데 가장 잘생겼고 가장 똑똑하며 가장 사랑받던 발드르라는 신이 로키라는 신의 못된 장난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전사자 신분이 아니니 발드르 신도 헬에 갈 수밖에. ‘귈피의 홀림’ 49장에는 헤르모드라는 신이 죽은 발드르를 만나러 헬을 방문하는 이야기가 있다.(이런 신화가 대개 그렇듯 발드르를 되살리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헤르모드는 어떻게 헬을 찾아갔나? 말을 타고 “9일 밤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고 깊은 계곡을” 달린 후 “아래쪽 북쪽”으로 향했다. 두 가지 대목이 눈에 띈다. ① 헬은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으며 ② 멀리 북쪽, 심지어 볕도 들지 않는 장소라는 것. 얼마나 추웠을까!
그렇다면 옛날 북유럽 사람이 헬 또는 헬헤임을 꺼린 점도 이해가 간다. 북유럽은 추운 지역이다. 추위에 시달리던 사람들로서는 얼음 지옥이야말로 고통스럽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성서>와 <꾸란>에 묘사된 지옥이 ‘불지옥’이라는 사실도 우연은 아닐 터. 이스라엘과 아랍은 더운 지역이니 말이다.
오늘날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큰 빙하의 이름이 헬헤임이라고 한다. 거대한 얼음덩어리에 어울리는 작명 센스랄까.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
광고
기사공유하기